11월 드루킹 재판 족쇄 풀리면 이재명처럼 바람 탈 수도…분화하는 친문계 선택이 관건
친문(친문재인) 직계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이낙연 대세론과 이재명 대망론이 박스권에서 경쟁하는 사이, ‘김경수 대안론’에 군불을 지피고 있다. 명분은 친문 적자 찾기다. 전제조건은 재판 중인 드루킹 족쇄의 해제다. 당 내부에선 친문계가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항소심이 예정된 오는 11월 승부수를 띄울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앞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무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 이후 치고 올라갔듯이, 김 지사도 재판 족쇄가 풀리면 ‘포스트 문재인’에 바짝 다가설 수 있다고 판단한 셈이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2019년 10월 2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경상남도 예산정책협의회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김경수 대안론을 띄운 것은 다름 아닌 ‘친노(친노무현)계 상왕’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다. 정계에서 물러난 이 전 대표는 9월 16일 ‘시사인’ 인터뷰에서 김 지사 재판을 언급하며 “살아 돌아온다면 지켜봐야 할 주자는 맞다”라고 밝혔다. 이어 “(김 지사가) 동안이라 그렇지 대선 때 55세면 어리지도 않다”며 “이 지사하고 별 차이도 안 난다”고 거듭 김 지사를 대선판으로 끌어들였다.
이 전 대표는 21대 총선 승리를 끝으로 정계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대권 막후 역할론’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1997년·2002년 대선 때 김대중(DJ)·노무현 정부 출범의 개국공신 역할을 톡톡히 한 대표적인 책사다. 이 전 대표는 이낙연·이재명 양강 구도 때도 “새로운 변수는 늘 가능하다”며 제3의 인물 출현 가능성을 시사했다.
당 내부에선 “친노 상왕이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인 김 지사의 앞길을 터줬다”라는 말이 들린다. 이 전 대표는 정작 자신의 보좌관 출신인 유시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차기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선 “책 쓰고 이런 쪽을 원래 더 좋아한다”며 일축했다. 여권 킹메이커가 양강 구도를 흔들 새로운 변수로 김 지사를 콕 집은 셈이다. 이후 친문계 의원들 사이에선 ‘김경수 대안론’을 거론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수도권 한 친문계 의원은 “김 지사 행보를 눈여겨보라”고 밝혔다.
이들이 김경수 대안론에 베팅하는 이유는 ‘이낙연·이재명 필패론’과 맞닿아있다. 여당 원톱인 이낙연 대표는 ‘민주당 대표 잔혹사’와 마주했다. 민주당 역사상 임기(2년)를 만료한 대표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처음이었다. 추 장관 바통을 이어받은 이 전 대표가 두 번째였다. 추 장관이 민주당 대표를 맡은 시기는 박근혜 탄핵 국면이었다. 이 전 대표가 민주당 당수를 맡은 것은 친문계가 여권의 성골로 자리 잡은 정권 교체 이후다. 그만큼 민주당 대표 자리는 성배가 아닌 독배였다.
더구나 이 대표는 전임자인 이 전 대표와는 달리, 사실상 비주류 수장이다. 올해 연말이 사실상 데드라인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완수를 비롯해 적폐청산 과정에서 당·청 간 엇박자 논란에 휩싸인다면, 친문 직계로부터 비토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당 한 원외 인사는 “공수처 개혁이 늦어질 경우 지지자들이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와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7월 30일 오전 경기 수원시 경기도청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2차 긴급재난지원금의 핵심 ‘통신비 2만 원 지급’ 과정에서도 이 대표의 약한 고리는 여실히 드러났다. 애초 전 국민 통신비 2만 원 지급은 문재인 대통령과 이 대표의 합작품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원팀’ 기조 아래 파열음 없는 정책을 선보인 것이다. 하지만 돌고 돌아 누더기로 지급된 통신비 2만 원 전 국민 지급의 원작자가 최재성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최 수석은 9월 6일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열린 고위 당·정·청 협의에서 전 국민 통신비 2만 원 지급을 이 대표에게 제안했다. 이후 이 대표는 사흘 뒤 청와대에서 열린 여당 지도부 간담회에서 이를 문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적극 화답했다. 이 과정에서 통신비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 비판은 오롯이 이 대표가 받았다. 이 대표가 막후 정치에 휘둘린다는 지적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이재명 필패론 핵심도 반문(반문재인) 정서다. 2017년 민주당 대선 경선 당시 이 지사는 사사건건 문 대통령과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친문 열혈 지지층과 이 지사의 지지층인 ‘손가락혁명군(손가혁)’은 루비콘 강을 건넜다. 1년 뒤 치른 민주당 경기도지사 경선 땐 친문계 핵심인 전해철 의원과 충돌했다. 전 의원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지속적으로 문 대통령을 비방한 ‘혜경궁 김씨(@08_hkkim)’를 고발하면서 이 지사 아내와의 연관성을 추궁했다. 이는 ‘친문 vs 비문’ 갈등의 도화선으로 확전됐다. 비문계 한 관계자조차 “친문계와 이 지사 사이엔 회복할 수 없는 앙금이 남아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친문계의 ‘김경수 카드’에 군불이 지펴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드루킹 댓글 조작 의혹의 항소심 재판을 앞둔 김 지사는 9월 들어 정치적 현안마다 목소리를 내면서 존재감 확인에 나섰다. 그는 당·정·청이 전 국민 통신비 2만 원 지급을 확정하자, 9월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9000억 원의 예산으로 전국에 무료 와이파이망을 확대하자”고 역제안했다. 앞서 9월 9일에는 “통계청을 확대 개편해 데이터청이나 데이터처로 만들자”고 말했다. ‘제2의 추미애냐’라는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기 대선주자급 목소리를 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9월 17일 스마트그린 산업단지 핵심인 경남 창원을 찾아 한국판 뉴딜을 치켜세웠다. 이 자리에는 김경수 경남도지사(가운데)도 함께했다. 이들이 공식 석상에서 만난 것은 지난 4월 경남 거제에서 열린 알헤시라스호 명명식 이후 5개월 만이다. 사진=청와대 제공
앞서 김 지사는 지난해 1월 정부의 예비타당성(예타) 면제 사업의 최대 수혜자로도 등극했다. 정부는 PK(부산·울산·경남)에만 6조 7000억 원의 예타 면제를 확정했다. 이는 총 규모(24조 1000억 원)의 20%를 웃도는 수치다. 특히 김 지사가 드라이브를 걸었던 남부내륙고속철도(서부경남KTX) 건설 사업 규모는 4조 7000억 원에 달했다. 당시에도 “정부 예타 면제의 키워드는 김경수와 부·울·경”이라는 말이 쏟아졌다.
여권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김 지사의 항소심 공판이 11월로 지정된 직후 ‘김 지사의 선명성 강화 발언(9월 9일과 12일)→이해찬 전 대표의 김경수 대권후보론 언급(9월 16일)→문 대통령과 김 지사의 만남(9월 17일)’ 등이 순차적으로 발생했다. 정치권 안팎에서 김 지사의 향후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친문 직계를 중심으로 김경수 대안론의 애드벌룬을 강하게 띄운다면, 여권 내부 권력구도는 사실상 새판 짜기에 돌입한다. 게다가 민주정부 1·2기인 ‘노무현·문재인’을 잇는 적통성, 참신한 이미지, 합리적 리더십 등은 김 지사의 강점이다. 물론 약한 대중성과 친문 직계 이미지 고착, 경험 부족 등은 김 지사가 넘어야 할 산으로 꼽힌다.
관전 포인트는 친문계의 최종 선택이다. 친문계는 21대 총선과 8·29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분화를 거듭하고 있다. 현재도 김태년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권파 친문계 일부는 이 지사를 지원 사격하고 있다. 박광온 사무총장과 양향자 최고위원, PK 친문 핵심인 최인호 수석대변인은 등은 NY(이낙연)계로 통한다. 이 대표가 임명한 민주연구원장 홍익표 의원과 수석 사무부총장 권칠승 의원 등도 친문계다. 민주당 한 당직자는 “친문계 중 일부가 이 대표 쪽으로 쏠린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묻지마 지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고 전했다.
당의 다른 관계자는 “친문계가 문 대통령의 본격적인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 이전 분화의 물꼬를 튼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귀띔했다. 친문계 표심 역시 ‘밴드왜건(편승) 효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당 복수 관계자들은 2016년 민주당 8·27 전당대회를 앞두고 ‘추미애 카드’를 택했던 당 주류의 행보를 주목했다. 추 장관은 이전까지만 해도 당의 대표적인 비주류로 분류됐다. 17대 국회에서는 노무현 탄핵을 강하게 밀어붙인 장본인이었다. 현재는 검찰 개혁을 업은 문 대통령의 호위무사 중 한 명이다.
대세를 따르는 당 주류의 습성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친노계는 참여정부의 레임덕이 본격화하자, 집권 말 사실상 노 전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 5년 차인 2007년 2월 22일 탈당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 탈당은 김한길계가 주도했지만, 친노계 중 다수는 침묵으로 동조했다. 친문계가 기존의 양강 구도 대신 ‘김경수 대안론’을 택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한 정치 분석가는 김경수 대안론에 대해 “11월 재판 족쇄가 풀린다면, 이재명 대망론처럼 바람을 탈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