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에서 극 후반부 ‘메인 빌런’으로 각성…어느덧 20년차 “연기인생 방향 잡느라 시간 오래 걸려”
‘주말드라마의 황태자’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로 변신에 성공한 김지훈. 사진=빅픽처엔터테인먼트 제공
“진짜 역할에 몰입해서 연기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여운이 확실히 긴 편이에요. 워낙 많은 사랑을 받아서 그런 건지, 아님 진짜 열심히 준비하고 열심히 연기해서 애착이 더 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끔 집에서 가만히 멍때리다가 백희성 대사를 중얼거리는 저를 발견하곤 해요. 물론 자주 그런 건 아니에요(웃음). 아무래도 백희성이 절 놔주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드라마상에서도 저만큼 백희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이해해준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요. 예전 같았으면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서 리프레시 할 수 있었을 텐데, 요즘엔 코로나19 때문에 집에만 있다 보니까 여운이 길어지네요. 그렇지만 이제는 잘 보내줘야죠, 불쌍한 희성이….”
최근 종영한 tvN 수목드라마 ‘악의 꽃’에서 김지훈은 15년간의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죄책감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백희성’ 역을 맡았다.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정체를 드러냈지만 그 섬뜩한 연기력과 강렬한 존재감으로 등장하자마자 시청자들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기도 했다. 특히 백희성의 정체 그 자체는 극의 흐름을 뒤집는 반전이었기에 시청자들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보통 이런 캐릭터를 맡는 배우들은 적절한 시점까지 정체를 숨겨야 하는 것이 가장 큰 고역이었다고 호소하기 마련이다. 이는 김지훈에게도 다를 바 없었다.
“시놉시스와 8회까지 대본을 읽고 출연을 결정했는데, 사실 시놉시스에도 인물 설명은 간단했고 대본상에서도 8회까지는 계속 누워 있는 상태라 이렇다 할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8회까지 대본만 가지고도 이후에 그려질 백희성이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죠. 개인적으론 큰 모험이었지만 감독님과 제작진 분들께서도 후반부에 백희성이 중요한 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고 힘을 실어 주셔서 큰 망설임 없이 결정할 수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반전을) 참 알려드리고 싶고 홍보하고 싶은데 말 그대로 존재감을 숨겨야 하니까(웃음). 보통 작품 할 때 홍보에 적극적인 편인데 홍보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심지어 제작발표회까지 참석하지 않는 걸로 결정이 났을 때는 아쉽더라고요.”
김지훈이 ‘악의 꽃’에서 맡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백희성의 반전은 극의 후반부에 다다라서야 공개됐다. 김지훈은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작품 홍보에 나서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털어놨다. 사진=빅픽처엔터테인먼트 제공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설정이라 모든 신에서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고, 기력이 쇠한 앙상한 느낌을 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산길을 뛰어 도망치는데 너무 팔팔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현장 세팅하는 동안 계속 맨몸 스쿼트를 하면서 하체 근육이 풀리는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그날만 한 300개 정도 했는데, 다음날부터 근육통이 오기 시작해서 일주일 정도 갔던 거 같아요. 다행히 드라마나 메이킹에서는 진짜 힘들어 보이고 불쌍해 보이더라고요(웃음).”
배우 김지훈 자체에 스포트라이트를 돌리자면, 그는 최근 ‘간헐적 단식 전도사’나 ‘장발 미남’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전자의 경우 식이요법과 피트니스로 파격적인 변신을 보여준 그에게 비법을 묻자 ‘간헐적 단식’을 언급하며 그 장점을 줄줄이 읊었다는 이유로 붙여졌다. 후자는 국내 남배우들 중에서는 드물게도 장발로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이면서 인기몰이를 한 데 붙여진 별칭이다. 특히 간헐적 단식의 경우는 이번 인터뷰에서도 장문의 찬양론을 들을 수 있었다. 너무 길어서 전문을 다 실을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간헐적 단식 전도사라는 별칭을 괜히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애초에 우리가 생각하는 다이어트 개념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경우가 많거든요. 섭취 칼로리와 소모 칼로리만 단순히 계산하는 기존의 일차원적인 다이어트 개념부터 좀 고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반면 간헐적 단식은 단순한 칼로리 계산을 넘어서서 우리 몸의 호르몬 작용과 대사 작용, 그리고 영양분의 질까지 생각하죠. 매일 먹고 싶은 걸 어느 정도 먹으면서도 살을 뺄 수 있기 때문에 장기간 지속이 얼마든지 가능한 점이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머리의 경우는, 확실히 짧은 머리가 편해요. 머리가 긴 게 이렇게 불편한지 정말 몰랐어요. 여자 분들께 리스펙트(웃음). 머리 감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샴푸도 많이 들어가고, 특히 여름에는 너무너무 덥더라고요. 그리고 장발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들이 있어서 옷을 입는 데 제약도 많아요. 하지만 멋있기 때문에 이 모든 단점들을 참아낼 수 있죠.”
‘간헐적 단식 전도사’라는 별칭을 얻은 김지훈은 이날 인터뷰에서도 간헐적 단식과 관련한 다양한 장점을 설명했다. 사진=빅픽처엔터테인먼트 제공
김지훈은 내년이면 벌써 데뷔 20년차 배우의 반열에 든다. 또 40대로 입성을 앞두면서 인간 김지훈의 삶에서도, 배우 김지훈의 삶에서도 중간 지점에 서는 셈이다. 2002년 데뷔 후 매년 최소 2개 이상의 작품에 참여하며 숨 가쁘게 달려왔던 인생을 한번쯤 되돌아 볼 시기기도 하다. 이에 대해 그는 “열심히 멀리는 달려왔는데, 제가 오고 싶던 곳이 아니더라”고 회고했다.
“연기 인생을 되돌아보면 참 열심히, 멀리는 달려왔는데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엉뚱한 곳에 와 있더라고요. 제가 오고 싶던 곳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제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다시 열심히 달려가려고요. 방향을 잡는 데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는데, ‘악의 꽃’을 통해서 첫 발을 뗀 기분이에요. 이제 40대가 됐으니 어떻게 해야겠다, 이런 것보단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늘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연기하려고 합니다. 연기자는 나이와 상관 없이 순수함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