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비상상고심 첫 공판…피해 생존자 40여 명 직접 출석 “과거 꼭 바로잡아 달라” 호소
경찰에서 보호 의뢰한 부랑아 하차 광경, 가정이 있는 아이들도 형제복지원으로 무분별하게 보내지기도 했다. 사진=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피해생존자모임
“인간의 권리는 평등하다고 했습니다. 물론 박종철 군은 대학을 다니는 지성인이고 저희들은 부랑인 수용소에 갇혀 있는 부랑인입니다.”
“사람을 이렇게 파리 목숨같이 생각하는 이곳을 저는 어떻게 하든 우리 국민, 모든 전 시민이 다 알고 공감을 갖게끔 할 수 있도록 이 모든 사실을 보도해주었으면 합니다. 멀쩡한 사람들을 정신병자로 몰아 약을 먹여 정신을 더 흐리게 만들고 멀쩡했던 사지가 병신이 되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어야 하고 정말 억울합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강 아무개 씨가 1987년 부산지방검찰청에 제출한 진정서에는 서러움이 담겨 있었다. 2020년 10월 15일 대법원에 모습을 나타낸 강 씨는 “복지원에서의 고통을 30년간 가슴에 묻고 살았다. 사건 인터뷰를 할 때마다 과거의 악몽에 시달렸다. 이제는 억울함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1987년 부산 북구에서 당시 형제복지원 원장 고 박인근 씨 등이 부랑인을 선도 및 교화한다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감금해서 강제노역과 학대, 성폭행 등을 저지른 사건이다. 기록에 따르면 513명이 사망, 시신 일부는 암매장되는 등 인권유린의 정도가 심각해 한국판 아우슈비츠라는 오명이 붙었다.
진실은 30년 넘게 고개를 들지 못 하고 있다. 검찰은 1987년 원장 박 씨를 업무상 횡령, 특수감금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지만 1989년 7월 법원은 횡령 혐의만을 인정해 박 씨에게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다. 특수감금은 무죄였다. 당시 법원이 형제복지원 운영을 내무부 훈령 410호에 따른 부랑민 수용으로 해석한 까닭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15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형제복지원 원장 고 박모씨의 특수감금 등 혐의 비상상고 사건에 대한 공판기일을 마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최희주 기자
그리고 2020년 10월 15일 오전 11시, 대법원에서 형제복지원 특수감금 사건에 대한 첫 비상상고 공판이 열렸다. 1989년 특수감금 혐의 무죄가 선고된 지 31년 만이다. 비상상고란 이미 확정이 된 판결에 잘못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청구할 수 있는 구제 제도다. 2018년 11월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법원에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비상상고를 신청했다.
오전 10시 40분쯤, 대법원 1호 법정 앞에는 이미 피해자 20여 명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새벽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피해자들도 여럿이었다. 이날 재판에는 형제복지원 피해자 40여 명이 직접 참석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푹 꺼진 이마를 보여준 한 피해자는 “하도 맞아서 머리가 다 파였다. 하도 맞아서”라며 “5일 동안 쉬지 않고 1인 시위를 한 적도 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판단이 나오길 바란다. 언제든 다시 거리로 나설 수 있다.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피해자는 “이제는 정말 몸이 좋지 않아 서울까지 오기 힘들다. 판사 선생님들이 과거를 꼭 바로 잡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검찰은 형제복지원의 운영이 위법하지 않다고 본 과거 대법원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1989년 7월 법원은 형제복지원의 행위는 내무부훈령 410호에 따른 부랑민 수용이었으므로 형법 20조(‘법령에 의한 행위’)에 근거해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봤다.
그러나 고경순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은 “형법 제20조에서 정한 ‘법령에 의한 행위’는 합법·합헌에 따른 것을 의미한 것인데 (내무부 훈령 410호는) 신체 및 거주의 자유를 침해하고, (그 내용이) 지나치게 광범위해 명확성이 현저히 위배된다. 피해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해 기한 없이 강제수용하는 것은 과잉금지 원칙과 적법절차 원칙에 위배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 감금이 내부무 훈령에 따라 정당하다고 본 것은 형법 제20조를 잘못 해석·적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에는 “과거 인권침해 실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며 피해자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피해자 참고인으로 출석한 박준영 변호사는 재판부에 비상상고 인용의 전향적 검토를 촉구했다. 박 변호사는 “30여 년 지나 비상상고를 통해 내무부 훈령 410호가 심판대에 올려졌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잘못된 무죄판결은 불이익 재심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수단은 비상상고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번 비상상고가 받아들여지면 과거 무죄 판결은 파기된다. 다만 재심과 달리 그 효력이 피고인에게 미치지는 않아 박 씨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후 진행되는 손해배상 등의 근거로는 작용할 수 있다.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한편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이 사건은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고 사회적, 시대적 아픔이 있는 사건”이라며 “대법원으로서도 신중하게 재판하고 있다”고 밝히며 공판을 마무리했다. 재판부는 법리적 사안에 대해 추가 검토를 한 뒤 조만간 기일을 정해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을 선고할 예정이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