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도와주지 그게 뭐 그렇게 힘들다고.”
엄상익 변호사
“뭘 도와드릴까요?”
“저기 분양사무실 안에 들어가 아파트를 사는 척하고 설명 들으면서 차 한잔 얻어 마시고만 나오면 돼요. 그래야 내가 일당을 받아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불성실에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니 그냥 그런 척하기만 하면 된다니까.”
그 아주머니는 나의 등을 떠밀었다. 일당을 받아야 한다는 자기 생각밖에 없었다. 가난 속에서 그렇게 양심이 메마른 나무처럼 비틀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변호사로 사기 분양사건의 피해자들을 상대한 적이 있었다. 상가 하나만 사면 노후가 보장된다는 거짓 광고들이 유명 일간지에 버젓이 실렸다. 그 내용이 사기인지는 알 바 없다는 게 언론사의 양심이었다. 유력 신문사의 지면이 서민들의 늪이었다.
분양 사기 피해자들 중에는 다시 분양을 해서 자신들의 잃어버린 돈을 찾자는 사람도 있었다. 자기의 불행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벌레 먹은 양심이었다. 정부에서 주는 재난지원금을 가지고 성형외과로 와서 점을 빼고 피부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 뒷골목에 은밀히 차린 명품점에서 정부 지원금으로 고가의 백을 사가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과도한 포퓰리즘 정책은 사람들의 양심을 병들게 한다. 험난했던 시절 독재의 담을 허물려고 헌신했던 운동권 출신들을 보면서 체제에 순종하고 양지에서 걷고 싶었던 나를 부끄러워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 역시 권력에 취해 변질이 되어간다는 의심을 품는다. 며칠 전 한 여인이 내게 이런 글을 보냈다.
“주사파였던 남자친구를 군대까지 따라가 눈물로 보냈었죠. 그 남자는 대학 시절 정의를 찾는다며 데모란 데모는 다 했죠. 군대 가서도 우리 군대는 식민지 군대라며 밤이면 북한의 김일성대학 특강을 단파 라디오로 들었어요. 1990년대 중반에 대학가에 돌던 전민항쟁 노선은 사실 우리 학번들이 뿌린 주체사상에 기반한 혁명적 군중 노선이었어요. 지금의 586 인간들이 후배들을 다 망쳐 놓은 거죠. 주사파 선배 한 명을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국회의원이더라구요. 저는 그 인간들이 전향했다고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사회 요소요소에 허리 역할을 하는 주사파를 발본색원해야 대한민국은 살아납니다. 걔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요. 사람은 안 변해요. 개나 소나 다들 정의를 부르짖지만 내 삶부터 실천으로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야 진정한 진보죠. 저는 지금 시장통에서 닭을 튀길지언정 신선한 기름을 쓰고 상태 나쁜 닭은 그냥 처분합니다. 주사파 걔네들 보기 싫어서 지금은 연락 다 끊고 삽니다.”
체험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양심의 소리였다. 포장지 색깔이나 무늬 같은 좌우나 계급을 가르기 이전에 알맹이인 개인의 영혼과 양심이 바로 서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모두들 추상적으로는 정의를 말해도 구체적으로 자기 문제에 들어가서는 작은 이익에도 이빨과 손톱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정의와 양심은 증발되고 자기 기준과 자기 생각만 남는다.
‘종북’을 욕하는 보수세력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뒤에서 북쪽 권력자들을 만나 휴전선에서 총을 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이 거리에 들고 나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추상의 깃발은 믿지 않는다. 보통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잠자고 있는 양심이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개개의 양심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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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