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당정치 선봉’ 나서자 북한 군부 견제 목소리…후계자 낙점 넘어야 할 ‘내부의 고비’ 많아
주석단에 앉아 있는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 사진=연합뉴스
2020년 북한의 키플레이어는 단연 김여정이다. 김여정은 3월 이른바 ‘담화문 정치’라 불리는 특유의 형태로 북한 정치 본류에 등장했다. 북한 지도부 2인자 자리를 꿰찼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대남 도발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9월 국가정보원은 김여정의 위임통치 관련 정보를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했다. 연초에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김여정은 연말이 될수록 2인자 지위를 확고하게 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 가운데 김여정의 후계자설은 복수 북한 전문가와 소식통 및 외신으로부터 강력하게 제기돼 왔다.
김여정은 3월 자신의 명의로 청와대를 비판하는 담화문을 게재했다. 단순한 담화문의 의미를 넘어 김정은의 여동생이 정치 제도권에 안착했음을 나타낸 사건이었다. 김여정의 정치 본류 합류를 예견이라도 하듯 조선노동당은 2월 김여정의 표준상을 공개했다. 표준상은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 지도자급 인사 증명사진을 일컫는 말이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이나 중국의 사례를 봐도 표준상을 대외적으로 공개한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관련기사 후계작업 신호탄? 사라진 김정은과 ‘김여정 표준상’의 비밀). 5월부터 북한 관영매체들은 김여정을 ‘당중앙’이라고 호칭하기 시작했다. 호칭 변경은 김여정의 정치적 입지 변화 예측을 가능케 한 대목이었다.
김여정은 6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증명하듯 광폭행보에 나섰다. 광폭행보의 결말은 대형 사고였다. 김여정은 6월 16일 한국 정부 예산으로 지어진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을 진두지휘했다. 5월 말 탈북민들이 북으로 쏘아 올린 대북 전단과 관련해 김여정은 담화문에 상당히 불쾌한 심정을 담았다. 거친 말을 쏟아낸 김여정의 담화문은 ‘말폭탄’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김여정의 말폭탄은 실제 폭탄이 돼 남북협력 상징과도 같았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터뜨렸다.
개성공단 내부에 자리잡고 있던 남북 연락사무소. 북한은 6월 16일 이 사무소를 폭파했다. 사진=연합뉴스
이를 두고 복수의 북한 소식통들은 김여정의 말과 글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중 한 탈북민은 “북한에서 생각대로 행동을 관철할 수 있는 인사는 손에 꼽을 정도”라면서 “김여정은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결심하면 어떤 행동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보여줬다”고 봤다. 김여정의 정치적 위상이 몇 단계는 상승한 사건이었다. 김여정의 광폭행보가 이어지자 복수의 외신들은 김여정이 건강상태가 불안정한 김정은의 후계자로 지목됐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김여정은 4월 전 세계적인 이슈로 떠올랐던 ‘김정은 건강이상설’을 전후로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다졌다.
그리고 9월엔 김여정이 북한을 위임통치하고 있다는 보고가 한국 국정원으로부터 나왔다. 극심한 국정 운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김정은을 도와 위임통치 체제가 가동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김여정이 있다는 보고였다. 국정원 보고는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브리핑을 통해 전해졌고, 이 내용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김여정이 위임통치 중심축으로 거듭났다는 정보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국내외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 후계 구도가 김여정을 중심으로 짜이고 있다는 분석에 힘을 실었다. 국정원이 김여정의 북한 위임통치 관련 정보를 보고한 뒤엔 김여정의 대외 활동이 뜸한 상황이다. 오히려 위임통치설이 알려진 뒤엔 김정은이 더욱 적극적으로 대내 안정화에 초점을 맞춘 정치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김여정 표준상
결국 김여정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김정일 시대의 선군정치(군을 우선시하는 북한의 정치 방식)와 김정은 시대 선당정치가 충돌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김정일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선군정치 풍토가 김정은 집권 이후 많이 바뀌었다”면서 “김정은은 군보다 당을 앞세워 국가를 통치하는 양상”이라고 했다. 이 소식통은 “김정은이 북한 권력지도를 다시 그리는 상황에서 김여정은 ‘혁신과 변화’라는 메시지를 함축한 상당히 상징적인 카드”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김여정이 선당정치 선봉장으로 나선 점이 ‘급격한 변화’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북한 소식통의 분석이다. 북한 소식통은 “선군정치에서 선당정치로 정치적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도 굉장한 변화인데, 그 중심에 그간 북한 정치 권력에서 배제돼 있던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더해졌다”면서 “상당히 수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북한 군부가 두 가지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고 했다. 그는 “아마 김여정이 군부의 견제를 이겨내고 더 강력한 2인자로 거듭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 북한 전문가는 “김정은-김여정 남매는 결국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백두혈통 선당정치 체제를 완성시킬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 전문가는 “김정은이 김여정을 정치 전면에 내세운 것 자체가 이미 굉장한 변화를 이뤄낸 것”이라면서 “그럼에도 김여정을 명백하게 최고권력 후계자로 낙점하는 데엔 여전히 내부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에서 군의 입김이 많이 줄긴 했어도,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한 수준”이라면서 “군은 다루기 힘든 조직이면서도 북한 최고 지도자가 혈통 중심의 권력 지도 개편 작업을 하는 가운데 견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옆 김여정. 사진=한국 공동사진취재단
2020년 김여정이 북한 정치 2인자로 올라선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아직 김여정의 ‘왕세제’ 등극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김여정이 후계 구도에서 우위를 선점하려면, 지금까지보다 더 확실한 존재감 과시가 필요한 시점이다. 올해 북한 내부 정치적 존재감 부문에서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김여정은 중요한 분기점을 앞두고 있다. 북한 소식통들은 김여정의 정치적 상승곡선 분기점을 미국 대통령 선거로 꼽았다.
한 북한 소식통은 10월 21일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의 진검승부 결과에 따라 김여정의 추후 활동 반경이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소식통은 “트럼프는 북한과 협상에 있어 ‘오픈 마인드’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바이든은 원칙적인 대북 외교를 추구하는 입장”이라면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김정은의 김여정 활용폭은 더욱 넓어질 수 있다. 반대로 바이든이 정권교체를 이뤄낸다면 북한 내에서 군부의 목소리가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이 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
“잠시 북한 이슈가 잠잠하던 찰나 ‘한국 공무원 피살 사건’이라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하지만 북한은 미 대선 전까지는 굵직한 도발을 최대한 자제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김정은이 공무원 피살사건과 관련해 유례없이 빠른 유감 표명을 한 것도 이런 맥락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 내부엔 코로나19 방역이나 홍수 피해 복구 등 내부적인 정치 과제가 산적해 있다. 미 대선 전까지 내치에 집중하고, 미국 대통령이 선출되면 당선자 기조에 맞춰 새로운 대외 정책 노선을 설계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내부적으로도 미 대선에 촉각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산정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후계구도 역시 미 대선이 끝난 뒤에나 본격적으로 가닥이 잡힐 것이다. 최근 언론에서 보도된 김여정 미국 특사설 역시 트럼프 당선을 전제로 흘러나오는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