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다음은 임자 차례야”…JP에 3선개헌 설득
▲ 1997년 김종필 전 총리가 신림동의 한 검도장에서 검도 시연을 했다. 우태윤 기자 |
김종필 총리를 알게 된 것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부산에서 한 신문을 통해서였다. 이때 필자는 동래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의 초등군사반 16기로 훈련 중이었다. 아직 전쟁이 한창이었고 막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있을 때였는데 김종필 육군대위 등 150명은 도미 1차 유학의 길에 올랐다. 부산을 떠나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6개월 간의 미국 조지아 포트베닝(Ft Benning) 육군보병학교로 유학을 간 것이다. 이때만 해도 한국은 제대로 된 군사교육기관이 없었던 까닭에 밴 플리트(Van Fleet) 미8군 사령관이 건의해 한국군 장교들을 미국보병학교(150명)와 포병학교(100명)에 군사유학을 보냈고, 귀국 후는 전방의 작전참모 등으로 배속했다. 미국 유학 기간 동안 김종필 대위는 생소했던 미국의 문물을 <부산신문>에 게재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만큼 젊어서부터 총명했고, 글재주도 있었던 것이다.
앞서 육사 8기생 중 우수장교 30명은 모두 육군정보국에 배속돼 1계급 특진한 그룹이 있는데 김종필 중위는 여기에 속했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는 육군 정보국 북한반장으로서 갑작스런 남침으로 무너지는 전선을 시찰하고 전세를 정확히 보고한 일로 유명하기도 하다.
1956년 8월 두 번째 도미유학을 마치고 나는 육군본부정보국 전략정보과에 3개월 재직하고 다시 1956년 12월 미국 육군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의 교관으로 가게 됐는데 당시 육군본부정보국의 각 과장은 대령이었다. 이때 김종필만은 중령이지만 이미 기획과장이었다. 그 후 김종필은 민주당 정권 때 정풍운동에 앞장섰고. ‘16인 하극상사건’을 계기로 전역조치됐다. 워낙 김종필의 능력이 뛰어났던 까닭에 이때 작전권을 가지고 있던 미8군이 이를 문제 삼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났고, 미8군은 혁명의 주체가 누군지, 특히 좌경세력이 아닌지 우려했다. 혁명 과정에서 미8군의 승인 없이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인해 군사혁명위원회와 험악한 불신관계를 표출하기도 했다. 이때 김종필이 혜성과 같이 나타나 신설된 중앙정보부장으로 미8군사와 회담, 작전권문제를 해결하고 이어 박정희 의장이 미8군을 방문하면서 불협화음이 해소됐다. 군사정권의 기반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김종필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군사정권이 최고회의에 의해 정치안정, 부패척결, 경제개발, 한미외교, 한일국교 정상화, 민정이양의 길을 걷는 동안 김종필은 군사정권의 공고한 기반조성, 반혁명세력 척결 등 어려운 일, 안 되는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하지만 너무 똑똑하면 견제가 있기 마련이다. 결국 민정이양, 공화당 사전 조직, 4대의혹 사건 등으로 혁명세력 간에 균열이 생겼고, 김종필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63년 초에 1차 외유를 떠났다가 1963년 10월에 귀국해서 공화당 의장에 취임했다.
▲ 김종필 의장이 1963년 10월 1차 외유 때 밴플리트 장군, 20세기 폭스사장 등과 기념 촬영을 했다. |
제3공화국의 김종필 공화당 의장 시절 때는 경제개발의 자금이 없었다. 아무도 한일회담을 매듭짓지 못했는데 김종필이 또 해결사가 됐다.
그 유명한 ‘김-오히라[金-大平]’ 회동이었다.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유상 3억 달러(이때 일본외환보유고가 고작 11억 달러였다)’를 받아내며 한일관계를 정상화했다. 이는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미국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 돈으로 포항제철 등이 세워지고 또 미국이 울산정유공장도 짓게 됐다. 그러나 워낙 대일감정이 좋지 않았던 까닭에 많은 국민들, 특히 학생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김종필 의장은 서울대학에 가서 토론을 통해 학생들을 이해시키고 박 대통령도 학생대표를 만나 설득했지만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6·3사태로 번져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김종필 당의장은 부인 박영옥과 함께 미국으로 2차 외유를 떠났다.
미국에서 알찬 시간을 보낸 김종필은 드디어 컴백명령을 받고 1964년 12월 31일 귀국,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다.
김종필 공화당 의장은 1965년 미주리 주의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연설하고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대학은 영국의 처칠 수상이 ‘철의 장막’ 연설을 한 곳으로 유명했기에 큰 의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좋은 일을 치른 후 귀국하자마자 복지회 사건에 김용태 등 측근이 연루돼 곤욕을 치렀다. 그리고 이후락과 공화당 4인방의 견제를 받다가 1968년 봄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김종필은 박 대통령 치하의 2인자라 해도 항상 감시받았고 가택 수색을 11번이나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공화당 내 지지세력은 여전히 유지했다. 반대세력은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다시 등장한 것은 3선 개헌 때문이다. 김종필은 3선 개헌에 반대했고 그 추종세력들은 강경했다. 결국 박 대통령이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이 다음은 네 차례다’라고 설득, 공화당 부총재로 선거를 치르고 곧 국무총리가 되어 1971년에서 1975년까지 4년 동안 실세 총리를 지냈다. 그 사이 유신을 겪고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본정부와 해결하기도 했다.
김종필은 일본에서 일본을 가장 잘 아는 지도자로 존경받는다. 지금도 나카소네 전 수상의 ‘국가 지도자 포럼’에 초대된다. 김종필은 국무총리가 되기 직전 미국을 방문했는데 이때도 미국 조야의 많은 지도자를 만났다.
당시의 ‘젊은 정치 실세’ 김종필과 관련해 아주 인상적인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보스턴 교외의 리이샤우어(Reichauer) 교수(전 주일대사) 집을 방문했을 때 “정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리이샤우어가 물었는데 김종필은 한참 생각하더니 “참는 것”이라고 답했다. 지금은 김 전 총리의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그때 그 젊은 나이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돌이켜보면 정말 대단하다. 김종필의 정치역정은 파란만장하고, 너무나도 복잡하고 기복이 심해서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민주공화당 총재에 취임해 개헌작업을 서둘렀다. 구금에서 풀려난 김대중 그리고 김영삼과 함께 동아일보 회장이 주선한 3김 회동에 참석했고, 새로운 개헌이 마무리되면 대통령 선거에서 3김의 격돌이 예상됐다. 그가 공화당 총재가 되자마자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서 박 대통령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12·12사태와 함께 신군부가 득세했고, 1980년 5·17비상계엄에서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된 후 3개월 만에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풀려났다. 공화당 총재가 되는 즉시 제주도 감귤농원과 서산농장을 사회에 환원했지만 신군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 김종필 총리가 태릉선수촌을 방문해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
그후 노태우, 김영삼과 함께 3당 합당을 단행해 민정당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김영삼 대통령 집권 후 축출됐다. 작고한 김윤환이 당시 김종필에게 나이가 많으니 나가라했는데 이에 “김윤환이 63세이고, 나는 69세다. 곧 자기도 69세가 될 터인데 나 보고 나가라한다”고 한 말은 아주 유명하다.
김종필은 다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해, 국회에서 45석을 확보했다. 김영삼 정권 하에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독자세력화에 성공해 캐스팅(Casting) 보트를 갖게 됐다. 1997년 대통령선거 때 김종필 총재는 다음에 내각책임제를 한다는 조건으로 김대중과 협력,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다시 국무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임동원 통일원 장관 해임 문제를 계기로 결별하고 2004년 총선에서 대패, 정계를 떠났다.
제3공화국의 주역으로서 조국근대화에 앞장서며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은 김종필은 젊은 시절 둘도 없는 ‘낭만청년’, ‘문학청년’이었다. 그가 한 번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역사에 ‘IF’ 즉 가정은 없는 법이다.
대한민국이 안전과 번영이 보장되는 복지국가, 일류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과 윤리와 법치가 바로 서야 한다. 여기에는 원로의 지혜가 필요하다. 국무총리를 두 번이나 지낸 김종필의 시대적 소임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그와 같은 원로의 지혜를 활용하는 것은 후대의 몫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