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남성상? 완벽한 연출일 뿐…
198cm의 훤칠한 키에 완벽한 미남형의 얼굴. 매끈하게 다듬어진 몸매와 부드러운 인상. 거친 말론 브란도나 감성적인 제임스 딘이 우상으로 떠오르던 시절, 록 허드슨은 달콤한 목소리로 여성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행복한 미소의 자상한 남자였다. 하지만 이 모든 이미지는 그의 삶과 항상 일치한 건 아니었다.
자동차 수리공이었던 아버지와 전화 교환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던 록 허드슨. 대부분의 배우들이 어린 시절부터 ‘끼’를 드러내는 것과 달리 록 허드슨은 대사를 못 외운다는 이유로 학교 연극에 참여하지 못했던 둔한 학생이었다.
게다가 생계유지를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우체국 직원으로 살아갔다. 삶의 전환점이 필요하던 그에게 2차 대전은 기회였고 해군에 지원해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그의 삶은 예전으로 돌아갔다. 이삿짐센터 직원, 우체부, 전화 회사 직원, 트럭 운전수…. 그가 배우가 되기 전에 거쳤던 직업들이다.
연기에 아무런 재능이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여러 에이전시에 보냈고 헨리 윌슨이라는 매니저는 그의 ‘육체’에 관심을 가졌다. 윌슨은 로이 해롤드 쉬어러 주니어라는 그의 긴 본명을 ‘지브롤터 암벽’(Rock of Gibraltar)과 ‘허드슨강’(Hudson River)을 합쳐 ‘록 허드슨’이라는 호연지기 가득한 이름으로 바꾸었다. 허드슨은 연기 기초부터 노래, 펜싱, 승마 등을 배웠고 치아도 가지런히 손질하고 갈라진 목소리도 묵직한 저음으로 교정했다. 그렇게 그는 ‘할리우드형 인조인간’이 되었고 1948년에 첫 대사에만 38번의 NG를 내며 데뷔한다.
‘잘생긴 삼류배우’였던 그는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와 <자이언트>(1956)로 스타덤에 올랐다. 성적 매력으로 가득하면서도 어딘가 억압받는 듯한 그의 이미지는 여성들의 판타지이면서 동시에 모성애를 자극했다. <자이언트>에선 가부장적 권위를 지키려 하지만 여성성 앞에서 서서히 굴복하는 남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베드룸 코미디’의 대표적 배우가 된다. 도리스 데이와 호흡을 맞춘 <필로우 토크>(1959) 이후 그는 적당히 섹시하면서 적당히 유머러스하고 완벽하게 로맨틱한 남자가 되었다. <필로우 토크>는 전환점과도 같은 영화.
할리우드가 그에게 원한 이미지는 ‘히 맨’(he-man), 즉 ‘남성미 넘치는 사나이’였다. 1980년대에 리처드 기어 같은 배우는 자신의 ‘헝크’(hunk·매력 있고 섹시한 남자) 이미지를 벗고 변신에 성공했지만 록 허드슨은 할리우드가 규정한 이미지에 갇혀 있었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은 1950년대부터 돌았지만 할리우드는 고의로 여배우와의 염문설을 뿌리고 비서와 위장 결혼을 시키면서 그의 남성성을 지켰다. 스튜디오 간부들은 30년 동안 굳게 입을 다물며 그의 상품 가치를 유지시켰다. 그는 사적으로는 게이, 공적으로는 이성애자였다.
하지만 1985년 6월 그는 파리의 한 호텔에서 쓰러졌고 처음에는 간암으로 발표되었지만 한 달 후 대변인은 록 허드슨이 심각한 병에 걸렸음을 알렸다. 그 병은 바로 에이즈였고 그는 10월에 사망했다. 이미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에이즈로 사망했지만 록 허드슨 한 명의 죽음보다 경악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에이즈로 사망한 최초의 유명스타였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비극적 죽음은 에이즈에 대한 경종이 되었고 레이건의 마초 정권은 그의 죽음을 동성애 탄압의 근거로 삼았다. 살아 있을 때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인간이었지만 죽음에 인접해서는 가장 추한 인간처럼 매도당했던 스타. 그는 스타라는 존재가 처할 수 있는 극과 극을 경험한 인물이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