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 선이 터치패드 건드려 엉뚱한 착점…대처 못하고 방관한 한국기원 대회 운영 도마 위
[실전진행] 1선의 착점 2020 삼성화재배 결승1국 ●신진서 9단 ○커제 9단 실전진행 결승 1국에선 초반부터 마우스 선이 걸려 삐끗했다. 21수를 1선에 둔 실착은 ‘한 수 쉼’과 다름없었다. 커제도 당황했는지 한참 고민하다 백22에 돌을 놓았다. A 또는 B가 정수였는데 이 수로 승률을 많이 깎아먹었다. |
삼성화재배는 스피디한 대회방식이 특징이다. 본선 32강부터 결승전까지 전체 일정이 약 10일 안에 끝난다. 단기간에 우승자가 나오는 방식은 대회를 보는 집중력을 높여준다. 올해는 악재가 겹쳐 더 화제가 되었다. 결승에선 신진서-커제가 만나는 ‘세기의 대결’이 만들어졌다. 신진서에겐 올해 첫 우승 과녁이자, 세계 일인자로 발돋움할 첫걸음이었다. 이 중요한 길목에서 지난 LG배 16강에서 아픔을 안긴 상대 커제와 만났다.
한중 랭킹 1위가 겨루는 ‘천하 쟁패기’ 기대감으로 바둑팬들도 오랜만에 격하게 끓어올랐다. 그런데 1국에서 신진서가 초반 1선에 실착을 두었고, 이 수가 끝까지 영향을 미쳐 결국 불계패했다. 다음날 이어진 2국은 4시간 50분 동안 혈투를 벌였다. 한때 신진서의 AI(인공지능) 승률 99%까지 갔다. 국내 방송, 유튜브 해설자들은 모두 승리를 낙관했다. 그러나 끝내기에서 따라잡혀 반집패했다.
결승1국에서 1선 착점으로 괴로워하는 신진서(위)와 깜짝 놀라 머리를 긁적이는 커제. 사진=바둑TV 유튜브·중국 대국 영상
결승전에서 2-0으로 우승한 커제는 인터뷰에선 “신진서에게 감사한다. 7~8차례 세계대회에서 만났는데 계속 내게 승리를 선사해주었다. 신진서가 아니었다면 세계대회 우승 횟수가 많이 줄었을 것이다. 고맙다”라고 살짝 놀렸다.
식지 않는 코로나19 유행으로 이번 대회도 전부 온라인으로 펼쳐졌다. 현장 대국자 화면에는 ‘이의제기’ 버튼이 있었다. 대국 관련 문제가 생기면 일시 중단하고, 선수가 심판이나 진행요원에게 알리는 버튼이다. 신진서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국 자체를 중단하지 않았다. 기자회견에서 “마우스 문제는 아니었다. 일단 충격이 컸고, 결국 내 실수라고 봤다. 고민을 많이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이의제기를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지금은 어쩔 수 없고 선수나 한국기원이 신경 써야 할 것 같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미스 착점 당시 중국기원 대회장에서 커제는 하품하고 있었다. 오전이라 조금은 나른한 표정이었다. 정면을 보다가 1선에 흑돌이 떨어지자 깜짝 놀란다. ‘내가 잘못 봤나’ 하는 표정으로 다시 모니터를 살펴보다 의자 뒤로 쭉 기대며 머리를 긁적였다. 자세를 고쳐 앉아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빙긋 웃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응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수읽기를 했다. 나중에 중국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1국에선 나도 아주 놀랐다. 대국을 정지하고, 이의를 제기할 줄 알았는데 아무 연락이 없었다”라고 의아해했다. 커제도 내키지 않았지만, 그냥 대국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승1국 신진서의 대국환경. 노트북 자판에 걸쳐 있던 선이 터치패드를 건드려 착점이 되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사건 하루가 지난 3일 오후에야 한국기원은 홈페이지에 ‘입장문’을 발표했다. 후원사 삼성화재와 대국자 신진서 9단에게 사과와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실질적인 ‘사과문’이었다. 원인에 대해선 “문제를 인지한 한국기원 담당직원은…(중략)…마우스패드에 선이 걸리면서 나온 착점 오류라고 말한 것으로 오인했습니다”라고 초점을 흐렸다. 입장문만 읽으면 귀가 어두운(?) 담당 직원의 착오가 죄다. 좁은 책상, 정리되지 않았던 마우스 선, 노트북 점검의 부재 등 원인을 세세하게 따지면 끝도 없이 문제가 나온다.
한국기원은 원래 오프라인 대회진행에 최적화된 단체다.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온라인 대회운영능력은 18급 수준이었다. 전문가를 알아보고 조언을 받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언제든 악수는 나올 수 있다. 이후가 문제다. 그런데 한국기원의 입장문 하나만 봐도 다음 행마가 빤히 보인다.
대국 당일 심판이었던 김종수 9단은 “입장문과 달리 현장에 달려온 직원은 오인하지 않았다. 마우스가 움직이면서 줄이 터치패드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나는 대국자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모니터를 보다가 직원이 와서 가서 설명을 듣고 규정집까지 살펴봤다. 심판으로선 일단 착점 자체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선수가 직접 이의 제기를 했다면 나서서 중국과 협의할 여지가 있었다고 본다. 당시는 기타 조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간이 흐르면서 커제가 대응 착점을 했다”고 설명했다.
결승2국에서 뼈아픈 역전패를 당한 신진서가 홀로 자책하는 모습.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한국기원 입장문 말미에는 ‘재단법인 한국기원’이라고만 적혀있다. ‘책임자 문책을 포함해 재발 방지에 만전을 기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이행할 주체조차 불명확하게 적고 있다.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뛰어든 직원만 엉뚱하게 희생양으로 만들고, 컨트롤 타워에선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게 이 조직의 현주소다.
이번 대회에서 IGF 심판위원으로 대회장 부근에 있었던 이성재 9단은 “물론 마우스 미스라면 대국자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이번 건은 일반적인 마우스 미스라고 보긴 애매한 상황이었다. 대국자가 직접 이의제기를 하긴 부담이 크다. 실수하곤 떼를 쓰는 것처럼 비치기 때문이다. 대국 심리에도 영향이 가고, 만약 커제가 안 받아주면 아주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린다. 꼭 무르기가 아니라도 약 20여 수 진행된 상황이라 재대국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결승 최종국이 아니라 1국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고 복기(?)했다. “현장에선 심판과 한국기원이 방관만 했다. 나섰다간 상황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에서 피해자는 한 명뿐이다. 진서가 불쌍하다.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어린 후배를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한 선배로서 책임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한창 물이 올라 뻗어 나가려던 스타가 된서리를 맞았다. 선수가 잘 달릴 수 있도록 운동장을 관리하는 게 원래 한국기원의 역할이다. 한 선수가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기도 전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현재는 책임자도 피해자도 신진서 한 명뿐이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