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 뻥
▲ 5공 시절 대표적 사조직인 ‘하나회’를 주도했던 전두환(왼쪽) 노태우 전 대통령. |
정치권력을 둘러싼 비공식적인 사조직은 과거부터 항시 존재했었고, 정권 변혁기마다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바 있다. 정권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일등공신으로 추앙받은 이들 멤버들은 권력자의 친위부대로 활약하며 승승장구했으며 권력의 단맛을 향유했다.
하지만 사조직을 등에 업은 이들은 권력 실세들과 유착, 권력 남용과 부패로 적잖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권력자의 연고자이자 정권 하수인을 자청했던 이들의 월권 및 이권 개입행위였다.
5공시절 대표적인 사조직은 하나회였다. 1963년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 육사11기생들의 주도하에 비밀리에 결성된 하나회는 제5공화국 탄생에 핵심 역할을 했다. 1979년에는 육사 11기, 12기생을 중심으로 신군부로 발전, 12·12 군사반란, 5·17 군사정변을 주도하는 동시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압 과정에도 참가했다.
하나회의 권력은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절정을 맞는다.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형성했던 이들은 군은 물론이고 청와대와 국회, 행정부, 기업체 등 사회 각계의 상층부와 요직을 장악하는 등 막강한 인맥파워를 드러냈다.
1993년 초 육사 31기생들이 동기회장 선출을 두고 ‘하나회’와 ‘비하나회’로 양분되어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는데 YS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4월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에 익명의 군인에 의해 ‘하나회’ 명단이 살포되면서 하나회는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된다. ‘군정 종식’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이 사건을 계기로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경질시키는 등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군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권의 태동에는 ‘월계수회’가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처남인 박철언 전 의원이 1987년 6·29선언 다음날 “대선에서 반드시 승리해 월계관을 쓰자”는 의미로 창립한 ‘월계수회’는 노태우 정권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안기부장 특보였던 박 전 의원은 대선 승리를 목표로 ‘노태우 스쿨’을 가동시켰고, 박 전 의원의 월계수회는 8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200만 회원을 둔 거대 조직으로 몸집을 키우면서 노태우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
▲ 노태우 전 대통령의 처남으로 ‘월계수회’를 창립한 ‘6공의 황태자’ 박철언 전 의원. |
하지만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권력 내부에서 월계수회를 견제하려는 권력투쟁이 촉발됐고, 인사·이권 청탁 등 월계수회의 불법 전횡과 관련된 루머와 투서가 끊이지 않았다. 정권을 쥐락펴락하던 박 전 의원도 역시 정권이 바뀐 1993년 5월 슬롯머신 업자에게 수표 5억 원이 담긴 가방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노 전 대통령의 동생 노재우 씨는 사조직 ‘태림회’를 만들어 노 전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다. 태림회는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언론에 그다지 노출되지 않았지만, 1995년 ‘노태우 비자금’이 드러나면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YS의 사조직 핵심은 민주산악회(민산)과 나라사랑운동실천본부(나사본)다. 민산은 YS가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1981년 5월 이민우, 김동영, 최형우, 김덕룡 등 정치활동 규제에 묶인 야권인사들과 함께 조직한 모임으로 그해 6월 9일 공식기구로서 발족됐다. YS를 고문으로, 이민우를 회장으로 각각 추대했고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지방조직을 확대하는 등 정치적 활동을 전개했다.
민산은 이후 매주 목요일 정기산행을 하면서 세를 확장했고 13, 14대 대통령선거 때는 YS 진영의 핵심조직이 됐다. 1992년 14대 대선 당시 민산의 회원 수는 150만 명에 이르렀지만 YS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스로 조직을 해체시켰다.
나사본은 YS의 아들 김현철이 YS의 선거운동을 위해 1992년 결성한 사조직이다. 안기부 내 경북고-고려대 인맥들을 영입해 언론대책팀과 선거전략팀, 조직관리팀 등 체계적인 조직을 갖춘 나사본은 선거관리자금 및 정권 배후와 관련된 모든 일을 담당하며 국정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현철은 나사본을 통해 권력을 사유화함으로써 국정을 쥐락펴락했는데 YS는 공식 라인에서 올라온 보고보다 아들의 보고를 더 신뢰해 김현철이 ‘소통령’으로 불리기도 했다.
▲ YS의 아들 김현철 씨. |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은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를 이끌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결성된 연청은 1997년 대선에서 ‘DJ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다. 연청은 이후에도 DJ 친위부대로 활동하면서 신인 정치인 발굴에 공을 들이면서 DJ가 만든 평민당과 국민회의 외곽 정치세력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DJ 친위부대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연청은 1996년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로 개명하고, 그해 말 민주당 공식기구로 편입됐다.
DJ는 1999년 6월 연청 정기대회에 메시지를 보내 “민주화에 헌신한 연청의 공로는 길이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이듬해 11월 간부 560명을 청와대로 불러 격려하는 등 연청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문희상 전 국회부의장(초대·6대)을 비롯해 정균환(2대) 김충조(3·4대) 최봉구(5대) 김옥두(7·8대) 남궁진(9대) 전 의원, 정세균(10·11대) 민주당 대표 등 역대 연청 회장 중에는 유명 정치인도 많았다.
하지만 연청도 DJ정권 내내 구설이 끊이질 않았다. 이 조직 출신들이 공기업과 정부기관 등 요직에 낙하산으로 대거 진출했는데 인사청탁 등 잡음이 적지 않았다. 김홍일 전 의원 역시 집권말기에 각종 게이트에 연루되는 운명에 처했다.
DJ 집권의 산실이었던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도 빼놓을 수 없다. 아태재단은 1992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DJ가 영국 유학 후 귀국해 1994년 1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아시아의 민주화, 세계평화에 관한 이론과 정책 연구개발을 목적으로 설립했다. DJ는 이 재단을 모체로 국민회의를 창당했었다.
아태재단 역시 끊임없이 구설에 휘말렸다. 순수한 학술단체가 아닌 ‘DJ의 정치 사조직’이라는 비난을 넘어 권력의 직행 통로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정치브로커들의 집합소로 전락했고 추문과 비리 의혹도 끊이질 않았다.
‘노풍’을 일으키며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노사모’는 과거 정권의 사조직과는 다소 성격이 다른 순수한 지지자 모임 형태로 운영됐다. 하지만 ‘노사모’ 역시 참여정부 출범 후 일부 인사들이 권력 실세들과의 유착관계로 인해 잡음이 없지는 않았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