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째 아마바둑에 애정 쏟아부은 ‘하고집이’…“한번 앉으면 3박 4일” 50대까지 ‘야통바둑’ 즐겨
이재윤 대구바둑협회장은 자신의 진짜 직업을 “봉사자”라고 말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인터뷰에선 자신의 진짜 직업은 “봉사자”라고 말했다. ‘봉사의 철학’이란 책까지 냈다. 지장보살의 ‘무한한 자비심’을 이야기하면서는 어느 때보다 눈이 반짝였다.
“대가 없는 봉사여야 합니다. 때로는 희생하고 시간을 바쳐야 하죠. 자식을 키우면서 눈을 맞추고 사랑했다면 나중에 효도하니 안 하니 따지면 안 됩니다. 내가 준 사랑 그 자체로 대가를 받은 거죠. 어떤 일을 했더라도 박수 한번이면 상이 넘칩니다. 주고 잊어버리는 게 봉사정신의 요체죠. 책에는 대상에 대한 ‘섬김’, 옆 사람에겐 ‘나눔’, 일하는 직원과 회원들에겐 ‘베풂’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썼습니다.”
대구지역 바둑협회를 돌보는 일도 이 회장의 봉사 중 하나다. 실제 유급직원만 4명이다. 사무실을 유지하고, 각종 행사와 기우회 활성화 등 지역 바둑계에 쓰는 금액이 매년 3억 원이 넘는다. 여러 곳에 후원하지만, 이재윤 원장이 가장 애정을 쏟은 곳이 바둑계였다. 이미 30년이 훌쩍 넘었다. 특히 아마추어에 대한 배려가 깊다.
덕영배 아마대왕전도 38년째 열리고 있다. 참가 선수 전원에게 성적에 따라 연구지원비가 주어진다. 바둑 둘 기회 자체가 급격히 줄어든 최근 상황에선 아마기객들에게 가뭄에 단비와 같은 대회다. 지난 11월 14일, 개막식 참가하기 위해 전국에서 64명의 아마최강자들이 대구 덕영치과병원 7층 홀에 모였다. 이어서 본선 1, 2라운드가 열렸고, 다음날까지 총 5라운드 경기를 치렀다.
첫날 저녁메뉴는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라 뷔페가 아니라 도시락이 마련되었다. 건물 6층, 넓은 식당 한 테이블에선 조민수 아마 7단을 비롯한 10여 명의 아마강자들이 도시락을 앞에 놓고 이재윤 회장을 빙 둘러앉았다. 최근 아마대회에 관한 이런저런 건의도 나오고 협회 돌아가는 사정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재윤 회장은 고개를 숙여 귀를 기울이며, 아무 말 없이 끝까지 듣기만 했다. 그리고 모두가 밥을 먹고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다. 이튿날도 오전 9시부터 대회장에 나와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 아마추어 기객과 호흡을 같이했다. 돌아가는 길엔 선수들의 손을 잡고 일일이 고맙다고 인사했다.
38년째 열리고 있는 덕영배 아마대왕전. 참가 선수 전원에게 성적에 따라 연구지원비가 주어진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이재윤 회장의 ‘바둑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대학에 입학하면서 배웠습니다. 단수도 모르는 초보자였는데 체질에 잘 맞았어요. 남자들은 모험에 대한 본능이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선 직접 주먹을 맞대고 싸우기가 어렵죠. 실력으로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종목도 많지 않아요. 바둑은 그런 기질을 발산할 수 있는 작은 전쟁터입니다. 스트레스도 풀 수 있고, 자기가 주도해서 판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푹 빠져 두다 보니 3개월 만에 1급은 되었습니다.”
“때로는 학점이나 학교공부를 놓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혈기왕성한 20대라 ‘아마추어 최강자가 되겠다’는 꿈까지 있었습니다. 바둑에 열정을 가지고 사카다 전집, 우칭위안, 린하이펑 기보집을 품고 살았죠. 제 기풍은 전투형이고 중반전에 발 빠르게 대세를 장악하는 데는 자신이 있는데 마무리가 서툴러 역전을 많이 당해요. 지금은 프로에게 넉 점 정도 놔야 합니다. 사실 바둑은 언제 배우냐가 중요해요. 대학입학 후에 접해서 이 정도 실력이면 한계에 다다른 거죠. 이기려면 계산력과 차분함이 필요한데 제가 그게 부족합니다. 열정만으론 다다를 수 없는 길이라 전국최강자가 되는 건 포기했습니다.”
한창 때는 야통바둑(밤새워 두는 바둑)을 즐겼다. 한겨울엔 기원 난로가 꺼진 줄도 느끼지 못했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2박 3일, 3박 4일 밤을 새워 두었어요. 밤새미 바둑습관은 50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거의 정상이 아니었죠. 바둑에 미쳤다고 할까. 파트너가 지쳐 떨어지면 뒤에서 기다리던 다른 상대가 바로 교대해 계속 두었어요. 소액 내기바둑을 두는데 돈은 거의 잃는 편이었죠. 이틀 정도 지나면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수가 잘 안 보이거든요. 그래도 계속 두었습니다. 이건 쾌감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이건 그냥 중독이라고 봐야겠죠. 기원에서 밤새미를 하고나면 병원이 며칠은 시끄러웠습니다”라면서 웃었다.
임플란트 전문가가 드물었던 시절 이재윤의 병원에는 환자들이 줄을 섰다. 월요일은 병원 담당자들이 가장 곤혹스러운 날이었다. 금요일 저녁부터 밤을 새운 이 원장이 종종 병원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로 하루 종일 기다리다 진료를 못 받고 가는 환자도 있었다. 그래도 뛰어난 진료능력 덕분에 병원은 전국에서 제일을 다툴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의 손으로 심은 임플란트는 8만 6000개가 넘는다. 굳은살 박인 엄지손가락으로 이 분야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38회 덕영배 전국최강부 우승자 박수창(왼쪽)과 함께한 이재윤 회장.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30대 초반, 대구에 협회조차 없었던 시절, 대구지역 바둑동호회 회장을 맡으면서 바둑단체와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한바둑협회 발족 후부터 지금까지 시도협회장을 쉼 없이 계속한 사람은 저뿐입니다. 한국기원 이사도 오래하면서 부총재까지 맡았고, 대한바둑협회도 수석 부회장으로 봉사했습니다. 당시는 지역프로를 만드는 게 숙원이었습니다. 한국기원 지원이라고 해도 지역에선 프로기사 1명을 찾기 힘들었죠. 프로기사 중 95%가 서울에 거주하니 지역 프로기사는 어쩌다 낙향한 한두 명 정도였어요. 고향에서 입단해 지역을 위해 바둑의 씨앗을 뿌릴 프로기사가 절실했습니다. 애써 노력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과거 정동식 총장 때 1명, 허동수 이사장 시절에 2명밖에 못 늘었어요.”
그는 이어 “어느 단체든 인구수가 파워입니다. 당시엔 입단 인원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창호와 같은 초등학생이 아파트 한 채 살 수 있는 금액을 쉽게 버는 시대였습니다. 몰려오는 인재를 감당하기 어려웠죠. 지방거주 기사가 늘면, 지역 연구생도 활성화되고, 일자리도 느는 선순환의 시스템을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발전할 시기를 놓쳤고, 바둑팬도 급격히 줄었습니다. 바둑계에 나눌 파이 자체가 사라졌어요. 이제는 정책을 새롭게 짜야 합니다. 좋은 기업을 유치하고, 바둑진흥법을 잘 활용해서 정부 지원도 끌어내 우선 바둑인이 살아갈 수 있는 방책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학창시절에 별명이 ‘하고집이’였다. 한번 바둑판을 잡으면 누구도 못 말리는 성격이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푹 빠져있어 생긴 별명이다. “바둑을 좋아했고, 여전히 좋아하고, 앞으로도 신념에 변함이 없을 겁니다. 좋아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제 자리에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 회장이 누구인지 이런 건 중요하진 않아요. 바둑을 사랑하는 아마추어 모두가 절실하게 협회를 살리겠다는 정신으로 단합하는 게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