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습사기범 불구속 웬말’ 피켓 시위
▲ 지난 4일 부산 중견기업 장남 문 씨로부터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김 씨가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문 씨의 구속 수사를 요구하며 1인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2008년 9월. 이천수가 문 씨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문 씨와 이천수의 법정다툼은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당시 문 씨로 인해 피해를 입은 자는 이천수를 제외하고도 모두 7명이나 더 있었지만 4명은 문 씨와 합의했고 3명은 아직까지 법정다툼을 벌이고 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김흥재 씨(48)는 8월 4일을 시작으로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재판이 열리는 10일까지 1인 시위를 할 예정이다. 연락이 닿지 않는 이천수를 제외하고 다른 피해자들도 뜻을 같이했다. 8월 4일 기자와 만난 김 씨는 “그동안의 진행상황을 봤을 때 사법부가 문 씨를 제대로 처벌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피켓시위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의 이런 우려는 문 씨에 대한 재판이 불구속으로 진행된 데에서 비롯됐다. 피해자들은 검찰의 불구속 수사로 인해 2차, 3차 피해자가 생겨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씨가 밝힌 사건의 정황은 이렇다. 그는 2008년 문 씨를 고소해 합의까지 끌어냈지만 문 씨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2010년 2월 문 씨를 재고소했다. 2008년 1심 공판 당시 검찰이 문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문 씨는 김 씨를 찾아와 울면서 사과하고 피해금액 19억 7800만 원을 순차적으로 변제하겠으니 구속을 면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김 씨는 피해금액을 돌려받을 생각에 문 씨와 문서로 합의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문 씨의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고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사실을 참작해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문 씨는 집행유예 기간 동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변제를 미뤘다. 피해자 측의 주장에 따르면 오히려 집행유예기간에 또 다른 피해자가 두 명 생겨났다고 한다. 자신의 부모님이 부산지역에서 6개 사업체를 거느린 중견기업 오너라고 밝히며 재력을 과시한 뒤 수억 원의 돈을 빌렸다가 갚지 않거나 개발권, 투자금 등을 미끼로 돈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집행유예 기간 동안 그가 빌려 쓴 후 갚지 않은 금액은 모두 30억 원에 달했다.
피해자들은 바로 이 점을 들어 사법부가 문 씨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죄질이 나쁘고 똑같은 피해자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도 사법부가 그를 구속하지 않는 것은 봐주기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하고 있다.
사건 담당 검사는 불구속 수사에 대해 “사기혐의의 경우 사실 여부를 가려내기가 상당히 힘들다. 동일 범죄를 계속해서 저지른다고 해 그것이 사실로 밝혀지기 전에는 무조건 구속할 수는 없다. 특히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었기 때문에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해 불구속 수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 대해 법조계 쪽에선 다른 시각도 보였다. 12년째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는 한병곤 변호사는 “가급적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지만 이 경우 조건부 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았고 집행유예 기간에도 다른 피해자를 양산한 혐의를 받고 있다. 때문에 추가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검사가 충분히 구속영장을 신청할 수 있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 변호사인 고승덕 의원도 “피해금액과 피해자 수를 봤을 때 구속 수사가 이뤄져야 하는 사안으로 보인다. 다만 사기 사건의 경우 피의자가 경제적인 능력이 없거나 고의성이 판명되지 않으면 구속수사를 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구속이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어도 사기혐의 내용만 봤을 땐 구속수사를 해도 무방한 내용이다”고 말했다.
다른 법조계 관계자 역시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을 경우에 구속수사 한다는 것은 형사법 상의 원칙일 뿐이지 실무에서는 사기혐의의 경우 이 정도의 죄질이라면 구속한다. 더욱이 집행유예가 선고된 자라면 그 가능성은 더 높다”며 “피의자에 대한 보호가 아닌 이상 구속 수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문 씨가 구속되지 않은 주된 이유로 ‘전관예우’(전직 판사 또는 검사가 변호사로 개업하여 처음 맡은 소송에 대해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특혜)를 받는 변호사 선임을 들고 있다. 8월 4일 기자와 만난 김 씨는 “문 씨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부산동부지법 판사를 지낸 인물로 재판 직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사람들이다”며 “문 씨는 법조계 전관예우 관행을 이용, 재판 때마다 최근에 개업한 변호사만 선임했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문 씨에게 사기피해를 당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검찰은 단 한 번도 구속수사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재판 결과도 문 씨에게 관대하게 나오지 않을까 우려됐다”며 “문 씨의 혐의를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고 말했다.
그는 피켓을 통해 ‘문 씨는 부산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는 법무법인을 내세워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며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사법부 부도덕성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바 사법부는 각성하고 문 씨를 하루 속히 구속하라’고 주장했다.
문 씨에 대한 재판은 그동안 개개 사건별로 따로 진행돼오다 이천수 사건을 제외한 나머지 사건이 합쳐져 2009년 9월부터 병합심리를 해왔는데, 조만간 선고공판이 열릴 예정이다.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 징역 6년을 구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