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 못 갚고 빚 늘리는 대기업들 부실화 우려에도 당장은 ‘민심’ 우려에 칼 못 대
‘굴뚝산업’을 중심으로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하기 버거운 기업들이 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구조조정을 논의할 시점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를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면서도 “하지만 코로나19가 끝난다고 해서 동시다발적으로 한 번에 모두 착수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너무 오랫동안 기업을 들여다보지 않고 있다. 뚜껑을 열면 상당히 많이 부실화돼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코로나19 대책으로 기준금리를 제로(0)에 가까울 정도로 낮춰 그나마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며 “나중에 수십 개 대기업이 한꺼번에 수술대에 올라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도 미묘한 시점에 강경론자들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 12월 7일 한 심포지엄에 참석해 “기업 구조조정은 때로는 많은 고통을 수반할 수 있다. 하지만 ‘질서 있는 퇴장’을 통해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한다면 우리 경제의 지속적 성장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관련 정부조직의 수장이 구조조정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자도 못 갚는데,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코스피 지수는 2700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고, 내년 상장기업들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은 11%대로 2010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팽배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일부 대기업이 국내 증시에 상장돼 있는 데에 따른 ‘착시’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 외 언택트 기업 몇 곳과 금융회사를 제외하면 우리나라 제조기업들의 여건은 그리 좋지 못하다.
한국은행이 지난 12월 6월 발표한 ‘2020년 1분기 기업경영분석’ 자료에 따르면 운수업종과 석유·화학업종, 음식·숙박업종은 이자보상배율이 100%를 밑돈 것으로 나타났다. 이자보상배율이 100%를 밑돈다는 것은 영업을 해서 거둬들인 수익으로 은행 대출 이자나 채권 이자를 지급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한은은 통상 3년 연속으로 이자보상배율이 100%를 밑돌면 기업의 존속 가능성이 낮은 한계기업으로 분류한다.
다만 1분기는 코로나에 대한 공포감이 가장 극심했던 기간으로, 3분기 기준으로는 이 수치가 다소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기는 하다. 한 금융정보업체에 의뢰해 3분기 기준 이자보상배율을 분석한 결과 시가총액 상위 100대 기업 중 27개 기업의 이자보상배율이 마이너스거나 100%대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2년째 마이너스거나 100%대인 기업은 10개사였다. 2년 연속이라는 것은 이미 지난해에도 재무부담이 적지 않았다는 의미다. 코로나만을 핑계로 댈 수는 없는 것이다. 10개 기업은 한국조선해양(73%), LG디스플레이(147%), 두산중공업(152%), 현대제철(42%), 대한항공(-25%), 삼성중공업(-31%), 한진칼(-464%), 롯데쇼핑(93%), 대우조선해양(98%), 한국가스공사(-130%) 등이다.
이런 와중에 전체 부채는 늘고 있다. KB국민과 신한, 우리, 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이 3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공개한 기업설명회 팩트북에 따르면, 3분기 말 기준 대기업 대출잔액은 93조 2795억 원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말(82조 3110억 원)보다 10조 원 넘게 늘어난 수준이다.
유상증자나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증시에서 조달한 자금도 큰 폭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1~11월 유상증자 금액은 13조 4400억 원으로 이미 지난해 기록(10조 7548억 원)을 넘어섰다. CB와 BW 발행금액도 같은 기간 6조 4800억 원으로 지난해(5조 3900억 원)를 뛰어넘었고, 회사채 발행 금액도 55조 원으로 사상 최대였던 지난해 기록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최근 몇 년간 이자 갚기도 빠듯했던 한 대기업이 CB 발행으로 상당액의 기존 부채를 상환했다”면서 “역대급 활황 덕분에 재무제표를 개선한 것인데, 이 같은 증시 활황이 앞으로도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계속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의 여신담당 임원은 코로나19가 오히려 부실 기업들에 버팀목이 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코로나19 덕분에 경영 부실을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라며 “심지어 대기업들조차 코로나19를 핑계로 KDB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정책자금을 손쉽게 가져다 쓰는 판이 됐다”고 꼬집었다.
서울 동대문 두산타워. 사진=연합뉴스
#동력 잃은 구조조정…그나마 ‘배당 자제’라도
하지만 금감원이 주도적으로 나서 재무구조 개선을 지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정부 입장에서도 코로나19가 핑곗거리가 돼주기 때문이다. 총선 직후 구조조정에 착수해도 될까 말까인데, 현 시점은 동력도 부족하다는 평가다. 금융권의 다른 관계자는 “코로나19 시대에도 실적이 좋은 기업은 대부분 본사가 서울이거나, 서울 인근의 수도권”이라면서 “칼을 댄다는 것은 결국 구조조정과 맞물리는데, 총선 직후라면 모를까 지역 민심이 휘청거릴 수 있어 정부가 진두지휘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그나마 현실성 있게 나오는 얘기가 기껏해야 배당 자제다. 사실 재무제표가 우량하지 않은 기업이 ‘배당잔치’를 벌이는 데에 대한 금융권의 시선은 따갑다. 돈이 있으면 대출 상환부터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자금 사정과 별도로 고배당을 진행하는 기업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두산이 꼽힌다. 두산중공업에 3조 원대 정책자금이 수혈되는 판이지만, 두산은 총수 일가에 대한 배당 필요성 때문에 고배당을 집행 중이다. 두산은 올해 주당 5200원을 배당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현 주가가 5만 원대 초반이기 때문에 배당수익률이 무려 10%를 넘는다. 이에 대해 두산 한 관계자는 “아직까지 결정된 것은 없다”면서 “시장에서 추정하는 주당 배당 금액은 지난해에 근거한 추정치일 뿐”이라고 밝혔다.
한진칼도 코로나19 여파에다 경영권 분쟁,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는 대형 M&A(인수합병)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대주주인 조원태 회장의 상속세 재원 마련 때문에라도 배당을 실시할 가능성이 높다. 한진칼은 올해 초 “지주회사로서의 특성을 반영해 ‘별도 재무제표 기준 당기순이익(일회성 비경상 이익 제외)의 50% 내외를 주주에게 환원’하는 정책을 유지할 계획”이라고 공시한 바 있다. 한진그룹 한 관계자는 “여러 상황이 맞물려 있고 내년 3월 주주총회 전까지 상황을 봐야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결정된 것이 없다”고 전했다.
민영훈 언론인
임홍규 기자 bent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