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이끼리 싸우면 박근혜만 웃는다’
▲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왼쪽)와 박영준 지식경제부 2차관. |
그동안 정치권에선 7·28 재보선을 통해 ‘야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재오 장관 후보자가 형님 라인과 권력다툼을 벌일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었다. 이 대통령이 이 후보자와 박영준 차관에게 각각 정치와 경제 부문을 맡겨 ‘역할 분담’을 모색한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여권 관계자들은 그동안 갈등관계에 있었던 이 후보자와 박 차관이 정권재창출이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전략적 제휴’를 맺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기도 한다. 여권 주류의 권력구도가 ‘이재오+이상득’ 세력 대 한나라당 소장파로 재편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이 후보자와 박 차관을 ‘투 톱’으로 내세운 속뜻을 따라가 봤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 후보자의 장관 임명을 결심한 시기는 휴가 중이던 지난 8월 3~4일경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지방 모처에서 개각 및 8·15 경축사 준비를 하던 이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이 후보자 입각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8월 8일 이 후보자는 ‘대통령이 특별히 지정하는 사무’를 수행하는 특임장관으로 내정됐다.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이상득 의원과 긴밀한 논의를 했다고 한다. 이 의원의 한 핵심 측근은 “이 후보자가 국회에 들어올 경우 이상득 의원과 마찰이 생길 것이란 내용을 이 대통령도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이 의원이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이 후보자의 역할에 어느 정도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이 대통령에게 건의했던 것으로 안다”면서 “‘형님’ 세력과의 충돌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후보자의 정치력도 필요했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특임장관을 맡긴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 후보자에 대한 ‘깜짝 인사’가 발표된 후 정치권 시선은 박영준 당시 총리실 국무차장에게로 쏠렸다. 총리실 불법 사찰과 공기업 인사 개입 등 이른바 ‘비선 라인’의 몸통으로 지목받던 박 차장이 차관급 인사에서 살아남을지가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 대통령이 그를 변함없이 신뢰하고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한때 총리실 잔류가 유력했으나 발표(8월 13일) 며칠 전에 지식경제부 2차관으로 급선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차관 본인이 이 대통령에게 정치색이 덜한 경제부처로 가 자원외교에 매진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이 대통령이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는 후문이다. 앞서의 이상득 의원 측근은 “(박 차관이) 먼저 이 의원과 상의를 했다. 총리실에 남아 있는 것은 이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지식경제부로 가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면서 “이 의원이 이러한 뜻을 이 대통령에게 전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치는 이재오, 경제는 박영준’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털어놨다.
▲ 8·8 개각의 깜짝 인사 뒤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형님’ 이상득 의원의 긴밀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
그러나 이번 개각 이후 여권 주류의 권력지형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 후보자가 소장파가 아닌 이 의원 쪽으로 기운 듯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와 이 의원 측 내부에서도 이 후보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는 “이 후보자로선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 의원과의 싸움에서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 의원 역시 이 후보자와의 마찰을 우려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능력만큼은 높이 사고 있다. 이 대통령 남은 임기 동안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권을 재창출해야 한다는 사명도 양측의 공통분모”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장·차관 인사를 통해 이 후보자와 박 차관에게 역할을 배분해준 것도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권 내에선 ‘정치’ 부문을 맡은 이 후보자가 4대강 사업과 개헌 추진에 앞장설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 두 가지 모두 야권은 물론 여권 내에서도 큰 공방이 예상되는 사안이다. 그만큼 이 의원의 추진력과 전투력이 요구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이 후보자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겨룰 친이계의 ‘차기 주자’를 선별·관리하는 ‘특임’도 맡을 가능성이 크다. 이 후보자 측은 “아직 구체적으로 뭐를 해야 할지 결정 난 바 없다. 청문회 준비에 매진 중이다. (청문회가) 끝나면 우선 4대강 사업부터 챙기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경제’를 담당할 박 차관의 행보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다. 박 차관은 인사발표가 난 후 기자들에게 “수출이 부진했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일부 지역, 중남미를 상대로 자원외교를 강화할 것”이라면서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겠다”고 밝혔다. ‘왕차관’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예전 총리실에서 ‘왕차장’으로 불리며 정부의 주요 업무에 깊숙이 관여했던 것처럼 ‘차관 그 이상’의 역할을 할 것이란 말이 설득력 있게 퍼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식경제부가 산업·무역·에너지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곳이니만큼 박 차관과 재계의 관계 설정에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재계에선 ‘실세 중 실세’라는 박 차관의 지식경제부 입성이 달갑지만은 않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벌써부터 일부 기업들은 박 차관과 ‘선’을 대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박 차관에게 잘못 보였던 몇몇 대기업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재계는 어쩔 수 없이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 후보자와 박 차관이 역할을 나눠 맡고 있긴 하지만 그 지향점은 하나로 모아진다. 바로 ‘성공한 대통령’과 ‘정권재창출’이다. 이 두 가지는 별개가 아니다. ‘정권을 재창출해야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정치권 속설도 있다. 이를 기준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렇지 못한 대통령으로 나누는 정치 전문가들도 있다. 여권 일각에선 “이 대통령이 정권재창출에 별다른 관심이 없고 4대강 사업만 신경 쓴다”는 말도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전해진다. 임기 동안 계획했던 정책을 완수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긴 하지만 ‘차기’ 문제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한다. 여권 핵심부가 이 후보자와 박 차관의 ‘콤비 플레이’에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이 후보자와 이 의원 사이에 ‘해빙기류’가 조성되자 그동안 심정적으로 이 후보자와 가깝던 한나라당 소장파가 당황해하고 있다. ‘민간인 사찰 의혹’의 검찰 부실수사를 비난하며 그 배후로 박 차관을 거론하고 있는 소장파로선 ‘천군만마’를 잃어버린 셈이기 때문. 또한 여권 권력 구도에서 고립될 가능성이 커져 2012년 총선공천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수도권의 한 소장파 의원 보좌관은 “정치권이라는 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아군과 적군이 바뀔 수 있는 곳 아니냐”면서 “지금은 다소 불리한 국면이지만 조만간 또 지각변동이 일어나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