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페이지·페이 상장시기 피하자’ 업계 분주…KB·삼성 주관사 선정에 IPO 빅3 구도 변화 가능성
IPO 시장에서 1월은 전통적인 비수기로 꼽힌다. 2020년 1월엔 한 곳만 공모에 나서면서 공모금액은 102억 원에 그쳤고, IPO 규모가 가장 컸던 2017년 1월에도 공모액은 980억 원이었다. 그런데 최근 금융투자업계 집계에 따르면 2021년 1월 총 13개 기업이 상장을 추진하고, 공모액은 약 6976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월 공모금액 기준으로 2000년 이후 역대 최대 기록을 세울 것으로 관측된다.
연초부터 IPO 시장이 분주한 이유는 2020년 하반기부터 불어온 투자 열풍을 그대로 이어받기 위해서지만, 2021년 다수의 ‘대어’들이 상장을 예고한 상황에서 상장 비수기를 노렸다는 해석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대어급으로 거론되는 기업들은 LG화학 분사 기업인 LG에너지솔루션과 크래프톤, 카카오 계열사, SK바이오사이언스 등이다. 이들의 기업가치만 약 78조 원으로 추산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높은 IPO 시장 관심도와 새해 바뀌는 정책 등의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2021년 상반기와 하반기 모두 대어급 기업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점이 상장을 추진하는 기업들의 최대 관심사”라며 “시장에서 주목받고 성공적으로 상장하기 위해선 이들과 공모 시기가 겹치지 않도록 비수기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2021년 상장을 추진 중인 카카오뱅크와 카카오페이, 카카오페이지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이들이 특히 의식하고 있는 기업은 카카오 계열사들이라는 것이 증권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2021년 카카오페이, 카카오뱅크, 카카오페이지가 잇따라 IPO에 나선다. 현재로선 카카오페이가 상반기 증시에 먼저 입성하고, 카카오뱅크, 카카오페이지가 하반기에 IPO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업계에선 계열사 세 곳이 한꺼번에 상장을 추진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통상 대기업 계열사들은 공모시장의 투자 수요 분산을 우려해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상장 시기가 겹치지 않도록 일정을 조율한다. 반면 카카오는 계열사마다 독립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경쟁하는 구조다. 창업자 김범수 이사회 의장도 별도 시기 조율 없이 준비된 회사들은 먼저 상장하라는 방침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카카오 계열사들의 상장 추진에는 외부 투자자의 존재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막대한 자금력으로 내부에서 신사업을 추진하는 네이버와 달리,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차례로 설립된 카카오페이지, 카카오페이, 카카오뱅크는 외부 수혈을 통해 몸집을 불려왔다. 회사들이 본궤도에 올라있는 만큼 최근 1~2년 사이 투자금 수익화 요구도 있었다는 게 IB(투자은행)업계 전언이다. 상장을 통해 들어올 자금도 신사업 추진 또는 기존 사업 확장 등에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상장 이후 각각의 계열사가 관련 업계에 미치는 영향력도 관심사다. 카카오페이는 국내 핀테크(금융+기술)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IPO를 시도한다. 카카오페이의 상장 결과와 주식 시장 안착 여부 등은 다른 업체들에게도 파장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카카오페이는 2020년 카카오페이증권을 인수한 이후 국내외에서 본격적인 플랫폼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IPO 이후 유입된 자금들은 이 작업에 투입될 예정이다.
주식시장에서 가장 관심이 높은 카카오뱅크 역시 인터넷은행 첫 IPO 주자다. 출범 직후 급성장한 카카오뱅크는 대출 영업 등을 통한 성장세를 이어가기 위해 2020년 10월 말과 11월 중순 이사회를 통해 결의한 총 1조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최근 마무리했다. 이번 유상증자로 2020년 3분기말 기준 14% 수준인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20% 안팎으로 올라갈 것으로 관측된다. 자본금은 2조 383억 원, 납입 자본은 2조 8256억 원으로 늘어났다. 카카오뱅크는 상장 이후 주식시장을 통해 자본을 ‘점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카카오페이지는 2020년 IPO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코로나19 확산, 카카오게임즈 상장 등을 이유로 2021년 추진으로 방향을 바꿨다. 대신 카카오페이지는 카카오엠과 합병을 통해 몸값을 높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카카오페이지와 카카오엠은 큰 틀에서 보면 문화 콘텐츠 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이다. 페이지는 웹툰, 웹소설 등 콘텐츠 서비스를, 카카오엠은 음악, 드라마, 영화, 공연 등 사업을 한다. 모바일 중심의 콘텐츠 사업은 언택트 문화 확산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은 분야로 꼽히고 있다. 합병 이후 카카오페이지가 온라인 플랫폼 시장 지배력을 확보한 카카오톡을 배경 삼아 종합 콘텐츠 기업으로 변모할 경우, 기업 가치도 크게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카카오 계열사 상장은 일종의 장외전 격으로 증권사들의 경쟁 구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례적으로 주관사 선정 경쟁이 금융투자업계 최대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 기업가치가 조 원 단위에 달하는 만큼 주관사 선정 여부에 따라 IB부문 실적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증권사들의 해외투자사업 등이 사실상 올스톱되면서 IPO에 힘을 싣는 상황이라 조 원 단위 IPO 수주는 더욱 절실하다.
서울 여의도 증권가 야경. 사진=박은숙 기자
현재 IPO 시장 빅3는 한국투자증권, 미래에셋대우, NH투자증권이다. 그동안 압도적인 실적을 기록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다시 대형 IPO 수주에 성공하면서 시장을 장악했다. 그런데 최근 업계 4위를 유지하고 있는 KB증권이 카카오뱅크와 카카오페이지 주관사로 선정됐다. 특히 이례적으로 증권사 대표들이 직접 경쟁 설명회(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하는 등 물밑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카카오뱅크에선 단독 주관사로 이름을 올리면서 관심을 끌었다.
이해상충 문제가 KB증권 단독 주관사 선정의 배경으로 꼽힌다. 상장 주관사는 향후 실사 등을 진행하면서 기업의 실적과 사업 구조 등 민감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만큼 선정을 위해선 단순 상장 역량뿐만 아니라 대외적 역학 구도도 고려해야 한다. NH증권은 카카오뱅크의 경쟁사인 케이뱅크의 지분 10%를 보유한 3대 주주고, 미래에셋대우는 네이버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있다.
KB증권의 경우 카카오 경쟁사와의 이해관계는 없지만, KB국민은행이 카카오뱅크의 주요 주주에 올라 있다. 현행 규정상 증권사가 직접 지분을 5% 이상 가지고 있거나 계열사가 10% 이상 보유하는 회사는 주관사를 맡을 수 없다. KB국민은행의 지분율이 9%대라 이 기준을 벗어났다. 당초 KB증권은 카카오뱅크와 카카오페이지, 카카오페이 3곳에서 모두 주관사로 선정됐지만, 최근 카카오페이가 KB증권과의 대표주관 계약을 파기했다. 한 증권사가 3개의 딜을 모두 다루기에는 집중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카카오페이 주관사는 삼성증권이 단독으로 맡기로 했다. 삼성증권은 카카오와 인연이 깊다. 다음과 카카오 합병 대표 상장주관사였고, 2014년부터 2016년 사이에는 카카오의 자금조달을 대부분 맡아왔다. 이 기간 카카오는 7번의 회사채 등을 발행했는데, 이 가운데 4건을 삼성증권이 대표주관을 맡았다. 2020년엔 일반청약 최대 금액 기록을 세운 카카오게임즈 IPO 대표주관을 맡기도 했다.
IB업계 관계자는 “KB증권과 삼성증권은 대형 IPO 수주 성공으로 다른 거래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라며 “그동안 IPO 시장에서 빅3 구도는 좀처럼 깨지지 않았지만 KB증권이 카카오 계열사와 원스토어, SK매직, 호반건설 등을 수주하면서 주관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어 2021년엔 경쟁 구도 변화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