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만 돌아가면 ‘천의 얼굴’ 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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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데이비스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눈의 노경희, ‘한국의 브리지트 바르도’로 불리웠던 이빈화, 38-24-38이라는 믿을 수 없는 사이즈의 김혜정, 그리고 충무로 최고의 요부였던 도금봉. 한국 영화의 글래머 1세대는 이들로부터 시작하며, 이 가운데 도금봉은 가장 두드러지는 여배우였다. 이빈화와 김혜정이 ‘육체파’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단조로운 이미지에 머물렀다면 도금봉의 위대함은 그 넓은 연기 스펙트럼에 있다. 그녀는 황진이부터 심청이를 거쳐 유관순까지 모두 가능했던 전무후무한 배우였다.
1930년 8월 27일 인천에서 태어난 도금봉(본명 정옥순)은 만주 용정의 광명여고를 졸업한 뒤 연기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으로 몸담았던 곳은 악극단 ‘창공’. ‘지일화’라는 예명으로 무대에서 이름 높았던 그녀는 1957년 영화 <황진이>의 주인공이 되면서 영화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도금봉(都琴峰)이라는 이름도 이때 지은 것인데 황진이가 살았던 송도(松都)에서 도(都), 황진이가 즐겨 연주했던 거문고에서 금(琴), 그리고 영화계에 우뚝 솟는 인물이 되라는 의미의 봉(峰)을 합한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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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영화에서도 그녀는 괄목할 만한 캐릭터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한국 공포 영화의 초기작인 <살인마>(1965)로 놀라운 악녀 연기를 보여주었고 <목 없는 미녀>(1966) <월하의 공동묘지>(1967) 등으로 호러의 아이콘이 되었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는 소화력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의 식모 성환댁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작은 꿈이 꽃필 때>(1972) <토지>(1974)로는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코미디 연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는 <진성여왕>(1964) <내시>(1968) <산불>(1967) 등에서 보여준 에로틱한 이미지였다. 도금봉의 섹슈얼리티는 결코 소극적이지 않았다. 남성을 압도하는 육체성을 지닌 그녀는 레즈비어니즘까지 다다랐다. 유교적 가부장 제도가 팽배했던 시절에 노골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도금봉의 캐릭터는 많은 여성 관객들에게 대리 만족을 선사했던 셈이다.
영화 속 모습만큼이나 사생활도 파격적이었다. 데뷔 시절부터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고 이혼과 동거가 이어졌으며 도박을 하다 입건된 적도 있었다. 재혼한 남편의 아들이 그녀의 귀중품을 훔쳐 달아난 사건도 있었으며 촬영 중 교통사고를 당해 영화사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소송을 걸기도 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배우의 연기 생명도 시들기 마련이지만 도금봉은 달랐다. 그녀는 주변의 입방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여걸이었으며 당당하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했고 오히려 여론에 공세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것은 배우로서의 자신감 이전에 그녀가 얼마나 강한 내면을 지닌 여배우였는지를 보여준다.
자매처럼 지냈던 최은희가 ‘한국적 여성상’을 구현했다면, 문정숙이나 최지희 같은 배우들이 모던한 느낌으로 어필했다면, 도금봉은 어떤 쪽에도 기울지 않았다. 그녀는 강한 중심을 지닌 채 모든 캐릭터를 흡수했던 마성의 배우였으며 그런 카리스마는 그녀의 성적 매력을 더욱 상승시켰다.
1980년대부터 TV 드라마로 넘어와 간간이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쳤던 도금봉은 박찬욱 감독의 <3인조>(1997)에 탐욕스러운 전당포 주인으로 특별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연기 인생을 접었다. 그렇게 10년 넘게 대중과 두절되었던 그녀의 최근 소식은 바로 부고였다. 어느 복지 시설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전설의 스타 도금봉. 반드시 재평가해야 할 한국영화계의 거목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