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 들킨 ‘50억 달러’ 여우굴 속으로
김 위원장은 해외은행 등에 50억 달러(5조 5000억여 원) 안팎의 비자금을 은닉해 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해외 계좌 및 정확한 비자금 액수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외신들은 종종 김 위원장이 스위스나 룩셈부르크 은행 등에 비자금을 분산, 은닉하고 있을 것이란 보도를 내놓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나 물증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를 본격화하면서 김 위원장의 비자금 실체도 서서히 그 꼬리가 드러나고 있다. 김 위원장의 비자금 관리를 총괄하고 있는 북한 노동당 39호실이 미국의 금융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조세피난처’로 유명한 버진아일랜드 소재 은행에 계좌를 개설해 이용하고 있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도 높은 대북 제재 카드로 김 위원장을 전 방위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오바마 행정부와 미국의 금융제재에 맞서 김 위원장의 비자금 사수에 배수의 진을 친 북한 측이 서바이벌 게임을 펼치고 있는 형국이다.
김 위원장과 오바마 대통령이 막후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숨막히는 비자금 전쟁 속으로 들어가 봤다.
3남인 김정은에게 북한 권력 승계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는 김 위원장은 유럽 은행 등 해외에 40억~50억 달러 규모의 비자금을 은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통한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화폐개혁 실패로 인한 극심한 외화난과 대규모 홍수 피해 등 북한 경제실정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매년 2억~3억 달러 상당의 비자금을 조성해 세습체제 구축 비용 및 비자금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전체 비자금 규모 및 은닉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일부 외신들과 국내 대북 소식통들은 김 위원장이 40억~50억 달러 정도의 비자금을 조성해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나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처럼 스위스나 룩셈부르크 등 유럽 은행 계좌에 은닉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3월 14일자 보도를 통해 김 위원장이 유럽 은행 계좌에 40억 달러를 숨겨두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 핵무기, 미사일 기술 거래, 마약 밀매, 보험사기, 수용소의 강제노동, 외국 통화 위조 등을 통해 비자금을 마련했고, 과거 돈세탁에 대한 규제가 심해지기 전까지는 대부분 스위스 은행에 보관하고 있다가 돈세탁으로 유명한 룩셈부르크로 옮겨졌다고 이 신문은 전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의 비자금 조성과 관리는 ‘노동당 39호실’이 총괄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39호실은 노동당 직제상 중앙위원회 재정경리부 산하로 소속돼 있으나 실제로는 김 위원장의 비자금을 총괄하는 조직으로 당은 물론 군부나 어느 기관에서도 손을 못 대는 ‘성역’으로 분류돼 있다. 39호실의 세부적인 조직은 물론 그 규모와 실체는 북한 내부에서도 일급 비밀이라고 한다. 39호실은 대성은행에 비밀계좌를 갖고 있고, 스위스 등 유럽 은행과 홍콩, 마카오, 일본 등 아시아 유력 은행에도 자금을 분산 은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8월 30일 기존의 대북제재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새로운 행정명령을 발표하면서 노동당 39호실을 제재대상 명단에 새롭게 포함시킨 배경에는 김 위원장의 비자금을 비롯한 통치자금을 정조준하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 지도부로 흘러들어가는 자금줄을 옥죄는 동시에 김 위원장의 해외 비자금 실체를 밝혀냄으로써 북한 내부 민심을 흔들고 나아가 북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고도의 전략인 셈이다.
실제로 미국은 새 행정명령을 통해 북한의 재래식 무기 거래, 사치품 수입, 불법활동을 특정해서 제재할 수 있는 국내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김 위원장의 비자금을 정조준하는 동시에 북한이 슈퍼노트(위조달러), 가짜 담배, 마약 제조·유통 등 각종 불법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표함으로써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한 제재에 동참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 행정부는 김 위원장의 비자금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전 방위적인 행동을 개시한 상태다. 미국은 지난 3월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김 위원장이 긴급히 외국으로 도피해야 하는 상황에 대비해 스위스 은행에 보관해 오던 미화 40억 달러 규모의 비자금을 룩셈부르크 은행으로 옮겼다’고 보도한 내용에 대한 사실확인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룩셈부르크 정부도 미국의 대북 제재 방침에 동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룩셈부르크 재무부 대변인은 7월 28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을 통해 “유엔과 미국의 대북 제재에 따라 북한의 해외계좌를 통해 이뤄질 수 있는 불법행위를 면밀히 주시해 문제가 드러나면 적절한 사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미국을 필두로 한 국제사회의 금융제재와 김 위원장 비자금 추적이 본격화되자 노동당 39호실은 최근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소재 은행에 새롭게 비밀 계좌를 개설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8월 30일 중국의 대북소식통은 “북한은 미국의 금융제재에 대비해 버진아일랜드에 위치한 ‘퍼스트캐리비언은행’(FCIB) 로드타운 지점에 개설한 계좌를 해외 비자금관리의 주요 창구로 사용하고 있다”면서 “이 계좌는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대풍그룹)이 개설한 것으로 계좌명은 ‘하나홀딩스’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이어 “이 계좌는 실제 노동당 39호실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면서 “불법무기 거래 등 북한이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외화의 대부분은 이 계좌로 모였다가 ‘중국은행’의 북한 계좌로 송금된다”고 덧붙였다. 노동당 39호실-국가개발은행-대풍그룹으로 연결된 김 위원장의 비자금 라인이 FCIB 계좌를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진아일랜드는 전 세계적으로 손에 꼽히는 ‘조세피난처’로 유명하다. 특히 FCIB은 2001년에서 2005년까지 돈세탁으로 의심되는 거래에 대한 보고를 하지 않아 카리브해 벨리스 금융당국에 의해 113회나 기소를 당하기도 했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은 북한이 FCIB에 계좌를 개설한 것으로 알려지자 버진아일랜드 당국도 조사에 착수했다고 9월 9일 밝혔다. 이 방송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해외 비자금을 추적해온 일본의 인권운동가 가토 켄 ‘아시아국제인권’ 대표는 버진아일랜드 정부에 북한의 ‘돈세탁’ 혐의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이에 버진아일랜드 금융거래위원회의 재클린 윌슨 법집행국장은 9월 7일 ‘그 같은 의혹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으며 사실 여부를 입증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다’는 요지의 이메일을 가토 대표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적인 조세피난처로 유명한 룩셈부르크에 이어 버진아일랜드 당국이 김 위원장의 비자금 및 북한의 불법자금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김 위원장의 비자금 실체가 드러날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기자와 만난 정보당국의 한 관계자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전 방위적인 대북 제재 여파로 김 위원장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노동당 39호실이 해외 자금을 운용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39호실이 보유하고 있는 해외 계좌 중 중국계 은행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운용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룩셈부르크와 버진아일랜드 당국이 대북 제재에 동참할 경우 김 위원장의 비자금 실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전했다.
과연 베일에 가려져 있는 김 위원장의 비자금 실체는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한반도 주변 정세를 둘러싼 치열한 주도권 경쟁과 맞물린 김 위원장과 오바마 대통령 간의 비자금 전쟁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