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살인사건·고문 후유증 사망 유족 등 기자회견…“못 밝힌 13건 속 수많은 윤성여 있다”
왼쪽부터 이춘재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 넘게 억울한 옥살이했던 윤성여 씨, 이춘재 범죄를 밝혀진 ‘초등생 살인 사건’ 피해자 고 김현정 양의 아버지 김용복 씨, 이춘재 9차 사건 용의자로 몰려 경찰의 가혹한 수사를 받아야 했던 고 윤동일 씨의 형 윤동기 씨가 함께 1월 25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박현광 기자
윤 씨는 동생이 전해줬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악기 공장을 다녔던 동생은 퇴근길에 경찰에 붙잡혀 끌려갔다. 처음엔 같은 동네 처녀를 성추행했다는 혐의였다. 동생은 그 처녀를 추행하지 않았지만 그 처녀의 아버지는 경찰에 허위 진술을 했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처녀의 아버지는 윤 씨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한다.
동생 윤 씨는 마대 자루에 담겨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자백을 강요당했고, 허위 자백 진술서를 손수 27번이나 썼다. 현장 검증 때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준비를 마친 경찰은 언론에 9차 사건 용의자를 잡았다고 알렸다. 그렇게 동생이 방송에 나왔고, 윤 씨는 동생 실종 4일 만에 뉴스를 보고 동생의 행방을 알게 됐다(관련기사 [단독] 화성연쇄살인 9차 사건 피의자도 허위 자백 흔적).
현장검증이 공개적으로 이뤄졌다. 이때 윤 씨는 동생을 보러 갔다. 동생은 형 윤 씨를 보고선 용기를 얻었다. 그제야 자신이 범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언론사 기자와 방송사 카메라가 있던 현장은 발칵 뒤집혔고 현장 검증은 취소됐다. 마치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같았다고 윤 씨는 회고했다. 윤 씨 동생의 일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배우 박해일이 맡았던 역할의 모티브가 됐다.
윤동일 씨가 체포 첫날 시인한 성범죄 13건 가운데 9건이 담긴 진술서. 윤 씨는 체포되기 3년 8개월 전인 사건의 날짜와 시간, 피해자 나이, 심지어 피해자가 달아난 집 방향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사진=박현광 기자
윤 씨는 동생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했다. 아버지가 땅을 사려고 모아뒀던 적금을 깼다. 동생은 풀려난 뒤 1년 만에 병을 얻었다. 갈비뼈에 암이 생겼다. 동생이 왜 그 병을 얻었는지 알 수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분위기는 그랬다. 워낙 큰 사건의 용의자로 몰렸고, 간신히 빠져나온 입장에서 ‘나 범인 아님’이라고 써 붙이고 다닐 순 없었다.
동생 병원비에 온 집안의 돈이 들어갔다. 그때 이후로 윤 씨의 집은 궁핍했다. 이 사실이 부끄러워 31년을 숨기고 살았다. 윤 씨는 2021년 1월 25일 ‘이춘재 피해자’로 마이크를 잡았다. 윤 씨는 “동생을 잃은 것도 어이없지만, 동생이 떠나고 궁핍하게 살아온 것도 참 고통스러웠다. 앞으로 억울한 피해자가 안 생겨야 한다. 당시 수사 형사들이 책임질 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 씨와 같이 공권력 횡포에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피해자지만 피해자라고 말하지 못하고 30년 넘도록 이를 숨기고 살았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인 ‘이춘재 피해자들’이 1월 25일 과거 공권력의 반인권적 행위를 진상 규명해달라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신청했다.
이 자리엔 이춘재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 넘게 억울한 옥살이했던 윤성여 씨, 이춘재 범죄로 밝혀진 ‘초등생 살인 사건’ 피해자 고 김현정 양의 아버지 김용복 씨, 그리고 윤동기 씨 등이 참석했다. 이정도 법무법인 참본 변호사, 박준영 변호사, 김칠준·이주희 법무법인 다산 변호사가 ‘이춘재 피해자들’이 진실 규명을 신청할 수 있게 도왔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세 명의 ‘이춘재 피해자들’과 네 명의 변호사는 진실화해위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김칠준 변호사는 이날 “어마어마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만큼 가혹한 경찰 조사로 고초를 겪은 당사자는 눈치가 보여서 어딜 가서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경찰 조사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며 “국가는 당시 작동하지 않았던 사법 시스템, 자행됐던 공권력의 폭력 등 과거의 일을 소상히 밝힌 뒤 바로 잡고, 피해자들에게 반성과 사죄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온 국민이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춘재 초등생 살인 사건’ 피해자 유가족의 변호를 담당했던 이정도 변호사는 “당시 반인권적, 반인륜적 공권력 행사는 범죄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까지 피해가 미쳤다. 진상규명을 통해서 피해자 가족의 인권 침해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춘재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렸던 윤성여 씨는 재심을 청구해 2020년 12월 17일 무죄 선고를 받았다. 당시 수사 경찰이 윤성여 씨를 재우지 않거나 신체가 불편한 윤 씨에게 쪼그려 뛰기 등 가혹 행위를 시켰다는 점과 거짓 자백을 강요했다는 점 등이 인정됐다. 하지만 진실이 소상히 드러난 건 8차 사건밖에 없다(관련기사 20년 억울한 옥살이 윤성여씨 무죄 선고 “이제는 손해배상”).
박준영 변호사는 “이춘재 8차 사건 재심에서 무죄가 나왔고 정의가 실현됐다. 하지만 나머지 13건은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13건 속에도 수많은 윤성여가 있다”며 “당시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경찰 조사를 받았고, 적지 않은 수가 반인권적 수사를 당했다고 보여진다. 경찰청장의 사과가 아닌 정권 차원에서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2019년 11월 경찰 과학수사대 인원들이 피해자 김 아무개 양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야산을 수색하고 있다. 사진=박현광 기자
‘이춘재 초등생 살인 사건’의 피해자 고 김현정 양의 아버지 김용복 씨와 그 가족은 여전히 진실을 알고 싶다. 1989년 7월 당시 경찰은 김현정 양의 유골과 유류품을 발견하고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사건을 은폐했다. 당시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윤성여 씨가 지목된 뒤였고, 연쇄 살인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던 때였다. 결국 김현정 양은 실종 처리됐다. 이춘재가 2019년 10월 자신이 김현정 양을 죽였다고 자백했다. 30년 동안 딸이 실종된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 김용복 씨는 딸이 당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근 경찰은 당시 화성경찰서 형사계장과 지금은 사망한 형사 1명 등 두 명이 사건을 은폐했다고 판단했다.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진실은 여전히 미궁이다. 사건을 은폐한 건 당시 형사계장과 사망한 형사 1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진술도 나오고 있다. 당시 형사계장과 함께 김현정 양의 유골을 발견했다는 방범대장의 진술도 바뀌고 있다(관련기사 몰래 제사까지 지냈다? 다시 미궁에 빠진 ‘화성 초등생 실종사건’ 진실).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니 고통은 여전하다. 아직 딸의 유골도 찾지 못했다. 김용복 씨는 “대통령, 검사에게 자기 자식이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고 싶다. 경찰이 은폐한 걸 두고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묻고 싶다”며 “경찰이 은폐하면 민간인이 그걸 어떻게 찾느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고 말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