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발’ 치고 ‘쓱싹’…한치 오차도 없다
▲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 |
피해자들은 추석을 앞두고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재래시장을 찾은 주부들과 기념품을 사기 위해 종로 일대를 찾은 외국인 여행객들이 대부분이었다. 추석 연휴를 얼룩지게 만든 이들의 기상천외한 범행수법을 들여다봤다.
“명절 물가가 너무 올랐네.” 추석맞이 인파로 붐비던 동대문 제기동의 한 청과물 시장. 차례상에 놓을 과일을 고르고 있던 박 아무개 씨(여·62)에게 한 여성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다른 세 명의 일당과 함께 시장을 찾은 국 씨였다. 그는 추석 명절을 앞두고 주부들이 느낄 법한 피로감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자연스레 공감대를 형성했다. 박 씨는 재래시장에 오면 낯선 이들과도 몇 마디 주고 받는 일이 예사다 보니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몇 마디 응수했다. 그런데 그 찰나가 화근이 됐다.
국 씨와 한참 대화를 주고받은 후 계산을 하려 손가방에 손을 넣는 순간 지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박 씨는 현금거래를 해야 가격흥정이 가능한 재래시장에서 추석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25만 6000원을 은행에서 인출해온 터였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장을 보러 나온 주부들의 분주한 손길만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불현듯 수상한 느낌에 말을 건넸던 국 씨를 바라봤지만 태연히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박 씨는 망연자실한 채 피해사실을 인근 경찰에 신고하고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과 화목하게 보낼 추석의 꿈도 갑작스런 사고로 얼룩진 후였다.
박 씨의 지갑을 훔쳐 달아난 것은 국 씨 외 세 명으로 구성된 주부 소매치기 일당이었다. 이들은 박 씨의 시선을 분산시킨 후 인파 속에 뒤섞여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갔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주부들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겉모습과는 달리 이들은 수십 년 동안 범죄를 공모해 온 전문 소매치기단이었다. 이들 일당이 만난 것은 20~30년 전 교도소에서였다. 20·30대 때 절도죄로 같은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은 출소 후에 만나 범죄를 벌일 것을 모의했다. 이들은 현금거래가 오가는 장소를 전전하며 범죄를 벌였다. 그동안 함께 벌인 범죄만도 한두 건이 아니었다.
국 씨 일당은 지난 20여 년 동안 소매치기로만 52차례 경찰에 적발됐고, 교도소 역시 수차례 들락날락했다. 출소 후엔 다시 모여 소매치기 생활을 이어가는 일이 반복됐다. 그런 이들에게 추석을 앞둔 1~2주 사이의 기간은 대목이나 다름없었다. 재래시장은 대부분 현금거래를 하는 데다 명절의 경우 구입할 품목이 많아 주부들이 목돈을 마련해 나오기 마련이고 인파가 붐비는 틈을 타 작업을 하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점을 노려 재래시장을 돌며 박 씨와 같은 주부들의 지갑을 노렸다.역할분담도 철저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함께 범행을 벌여왔기 때문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익숙하게 범죄를 저질렀다. 먼저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국 씨가 범행대상이 될 만한 주부의 시선을 집중시키면 유 씨가 손가방을 열어 지갑을 가로챘다. 황 씨는 유 씨 주변에 서서 그의 범행이 보이지 않게끔 가리는 역할을 했다. 목적이 달성되면 유 씨가 지갑을 근처에 있는 김 씨에게 건네 줬다. 그런 후에 인파속으로 유유히 사라진 후 약속한 장소에서 함께 만나는 방식이었다.
재래시장만이 범행 장소는 아니었다. 현금거래가 오가고, 인파가 붐비는 곳이라면 어디나 이들의 범행 장소가 됐다. 이들은 인사동 일대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노려 소매치기를 벌이기도 했다. 고가의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고 있는 일본인 관광객의 손가방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들은 인사동의 한 공예점을 방문해 현금 44만 원과 14만 엔(약190만 원)을 가로챈 혐의도 받고 있다.
긴 꼬리를 물고 이어진 이들의 범죄행각은 추석을 맞아 대대적인 단속을 벌인 경찰에 의해 적발됐다. 국 씨와 유 씨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됐고, 김 씨는 도주했다. 황 씨는 범행 전모가 드러난 줄 모르고 국 씨와 유 씨에 대한 면회신청을 한 후 경찰서 마당에서 서성이다 붙잡혔다.
사건 담당 형사는 “피해자들은 주로 지갑을 뒷주머니에 넣거나 손가방을 어깨에 메고 뒤쪽으로 둔 주부들이었다”며 “손가방을 멜 때에는 시선이 향하는 앞쪽으로 두라”고 당부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