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관리소 ‘쇼와’ 새겨진 9개 돌 처리 1년 넘게 고심 “어두운 역사 제거 신중 필요”
종묘 담장에 새겨진 일왕 연호. ‘소화8년3월’이라고 적혀있다. 사진=최희주 기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당인 종묘(사적 제125호)의 외곽담장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남아있다. 종묘 외곽 담장에 일본 왕(히로히토)의 연호인 ‘쇼와’ 글자를 새긴 돌이 9개나 남아있는 것이다. 실제로 종묘 외곽길인 서순라길을 따라 걷다보면 ‘昭和八年三月改築(소화 8년 3월 개축)’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각자석을 확인할 수 있다. 쇼와 8년은 서력 1933년이다. 9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나 그 형태가 선명해 읽는 데 어려움이 없다.
연호는 말 그대로 해를 세는 방법이지만 천황제를 고집하는 일본에게 연호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연호는 각 시대 정신의 상징으로 일본 국민들은 서력보다는 연호를 더 많이 사용한다. 2019년 5월까지도 관공서 등 공식 서류에서는 서력이 아닌 연호가 사용됐다. 새 연호가 발표되었던 2019년 4월에는 각 언론이 아침부터 연호 결정 과정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우리 문화재에 일본식 연호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19년 4월부터 8월까지 종묘외곽담장에 대한 용역 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발간된 ‘종묘 외곽담장 기초현황 자료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일왕 연호가 새겨진 담장은 총 9개로 이 가운데 8개는 서순라길이 있는 서쪽에, 1개는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외에도 60간지가 새겨진 돌 73개가 추가로 파악됐다.
일왕 연호는 종묘 담장의 수리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조사를 담당한 건축사무소는 보고서에 “종묘 담장을 수리·보수하면서 해당 연도를 새기는 것이 법식으로 정해져 있었다”며 “현재 종묘 담장에 기재된 60간지는 조선시대 후기, 일왕 연호는 1932년 율곡로 개발 당시 창덕궁과 연결된 담장을 허물고 개축할 때 새긴 듯하다”고 추정했다.
1927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경성시구개수 제 6호선. 조선 귀족의 반대로 종묘 관통 구간 공사가 미뤄졌다는 내용의 신문보도가 있었다. 사진=종묘 외곽담장 기초현황 자료조사 보고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조선의 통감부 청사를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했다. 그러면서 도성 내 체류하던 일본인들은 주로 남산의 북사면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일본인들의 주 체류지가 도성 내 기존 도로와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통이 불편함을 느꼈던 일본 지도부는 시가정리를 명목으로 경성시구개선사업을 시작한다. 이 사업 가운데 하나가 종묘와 창덕궁의 경계를 관통하는 도로를 내는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뚫는 사업에 순종과 ‘전주 이씨’ 가문은 격렬히 저항했다. 그럼에도 1932년 공사는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종묘의 외곽담장 일부가 철거되고 수리되었는데 이때 돌담에 ‘쇼와’ 명문을 새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쇼와’ 돌담은 일제 강점 당시 훼손된 종묘의 어두운 과거인 셈이다.
2019년 문화재청은 “이 명문은 조선을 비하하거나 일제강점기를 찬양하는 내용이 아니”라면서도 “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항을 시민들에게 알리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문제는 1년이 지난 현재 쇼와 돌담 앞에서 이에 대한 안내판은 찾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2월 14일부터 16일에 걸쳐 종묘를 방문한 결과, 서순라길 인근에는 어떠한 안내판도 세워져있지 않았다. 다만 돌담 바로 앞에 쓰레기 투기 금지 안내판만이 있을 뿐이었다.
서순라길 앞. 돌담에 대한 안내판 대신 쓰레기투기 금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빠른 검토를 통해 문제 사항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최희주 기자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곳은 일본 관광객들에게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보물찾기 놀이를 하는 곳이 돼 버렸다. 한 종묘 인근 상인은 “코로나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이 줄어들긴 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 관광객들이 ‘쇼와’가 새겨진 돌담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다들 웃고 있었는데 어떤 일로 쇼와가 남게 됐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지난해 한 중년의 일본 남성이 안경을 벗고 고개를 숙여 돌담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사진을 찍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왜 그런가’ 하고 가보니 일왕 연호가 새겨진 돌담을 찍어간 것이었다. (연호가) 단순 수리로 남은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런데 이 부분이 명확히 설명되지 않아서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찍은 사진을 관광 홈페이지나 자신의 SNS에 올린 일본인도 있었다. 지난해 7월 한 일본인은 자신의 블로그에 종묘와 돌담 사진을 올리며 ‘이 담에 일본어로 연호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쇼와 8년 3월 개축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다’ ‘바로 옆에는 한국식 연대표기도 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종묘 돌담과 관련된 글에 일본 누리꾼들은 “일본에 의해 적절하게 관리되었다는 증거이며 이를 최근에 알았다는 것은 (한국이) 적절하게 관리하지 않았다는 증거다”라며 “쇼와를 지우면 역사를 지우는 것이다. 쇼와도 종묘의 역사다”라는 의견을 남겼다.
‘쇼와’ 돌담의 처리를 두고는 종묘관리소도 1년 넘게 고심 중이다. 정명환 종묘관리소장은 17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최근 ‘돌담에 새겨진 명문을 지워야 한다’는 민원이 적지 않게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쇼와’ 돌담은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역사다. 하지만 어두운 역사의 흔적인 ‘네거티브 문화재’를 전부 없애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지우는 것은 쉽지만 한 번 없애버리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 청취와 자문을 거쳐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한편 “안내판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여 빠른 시일 내에 수정‧반영하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