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금 따자 시상 양보…배려심도 ‘대물’
▲ 왼쪽부터 IOC 집행부 바흐, 사마란치, 필자. |
토마스 바흐는 서독 뷔르츠부르크에서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 태어났다. 그는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법과 정치학을 공부했고 법학박사를 받았다. 이후 다방면으로 활동을 했고 기업체 회장과 여러 회사의 이사직을 수행했고 아랍, 독일 상공회의소 회장도 지냈다.
일찍부터 펜싱 테니스 럭비 등 활발한 운동을 즐긴 바흐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펜싱(플뢰레)단체에서 금메달을 땄고 1976·1977년에 유럽 펜싱선수권 우승 등 많은 경기에서 입상한 펜싱맨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필자는 IOC 집행위원으로서 올림픽 경기 전반 관리, 최초로 올림픽 종목이 된 태권도 경기의 운영 및 감독,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올림픽위원회 수장으로서 한국의 메달 획득을 책임지는 역할 등 유례가 없는 세 가지 소임을 동시에 맡고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으로서 북한의 부산아시안게임 참가를 교섭해야 할 입장이었고, 자연히 북한올림픽위원회와의 남북동시입장 교섭이 덤으로 진행됐다. 원래 국제경기나 회의 때는 많은 사람이 장시간 모여 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기 좋다.
어쨌든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드니올림픽 기간 중 필자는 갑자기 기대를 안 했던 펜싱에서 한국의 김영호가 독일 선수와 결승에 맞붙는다는 연락을 받고 뛰어갔더니 독일의 바흐 집행위원이 와 있었다. 바흐가 메달 시상자로 예정돼 있었다. 독일이 우승할 줄 알고 시상자 신청을 한 것 같았다. 필자도 미리 한국이 우승할 만한(가끔 빗나가기도 하지만) 종목인 양궁 배드민턴 태권도(총재로서 당연히)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등의 시상 신청을 해왔다. 개인적으로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는 아이스하키 금, 은, 동 60명 시상을 룩셈부르크 대공, 호주의 고스퍼(Gosper) IOC 부위원장과 셋이서 치른 적도 있다.
시상자는 일단 결정되면 함부로 현장에서 바꿀 수 없다. 그런데 바흐가 독일 선수가 이기면 예정대로 자기가 시상하고 만약 김영호가 우승하면 나에게 시상을 양보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며 정중히 사양하는데도 바흐는 괜찮다고 말했다. 참고로 애틀랜타올림픽 때 이건희 회장이 갓 IOC 위원이 됐는데 마땅히 시상할 종목이 없자 IOC 위원장 비서실에 부탁을 넣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남자 양궁 시상자가 노르웨이의 스타우보(Staubo) 위원에서 계획에 없던 이건희 위원으로 무리하게 바뀌었다. 이 일로 양궁 회장이던 제임스 이스턴(James Easton) IOC 위원(미국)이 필자를 엄청나게 오해했고, 현장까지 와서 시상을 못하게 된 스타우보 위원은 IOC 위원장에게 항의편지까지 썼다. 이때 불행히도 한국은 금을 따지 못해서 시상효과가 반감되고 말았다.
▲ 1999년 IOC총회에 참석한 로게, 필자, 바흐(왼쪽부터). |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면 바흐가 1981년 바덴바덴 IOC총회에서 선수 출신 대표로 두각을 나타냈고,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아디다스(Adidas) 관계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집무실로 필자를 찾아온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유럽 스포츠계는 아디다스 출신이 많다.
곧이어 바흐는 1991년 버밍엄 총회에서 자크 로게(Rogge) 현 IOC 위원장과 함께 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93~94년쯤에는 IOC총회에서도 소장파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그는 96년 애틀랜타에서 이미 집행위원이 되었다. 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에서 집행위원이 된 로게보다 2년이 빠른 셈이다. 필자는 로게가 그때 준 300달러짜리 몽블랑 만년필을 아직도 쓰고 있다.
바흐는 곧 IOC의 여러 가지 업무를 맡게 됐고 동계올림픽 평가위원장, 선수분과위원, 신문분과위원, 사업분과위원, TV교섭위원, 법률분과위원장을 역임했다. 변호사이므로 법률 쪽에 주로 관여했다. 최근 유럽 지역 TV방영권 교섭도 바흐의 책임 하에 진행됐다. 또 메르세데츠 벤츠, 루프트한자 등이 IOC의 스폰서가 되는 데 교량 역할을 했고, 북한올림픽위원회에 트럭과 버스를 기증하고 다리도 놓았다. 바흐는 사마란치 지시로 직접 북한에 가기도 했지만 사실 별 성과는 없었다.
바흐는 가끔 독일 외무장관이 외국에 갈 때 동행하곤 했다. 2001년 APEC 회의 때도 독일 총리를 수행했다. 93년 필자와 차녀인 피아니스트 김혜정이 독일 쾰른 국제콩쿠르에 1등으로 입상하여 부상(副賞)으로 베를린, 쾰른, 졸링엔 등에서 연주회를 갖게 돼 필자 내외도 독일로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바흐 부부는 200㎞씩 떨어진 곳에서 달려왔다. 선물은 꼭 독일 작곡가 베토벤이나 바흐 등의 곡이 담긴 CD였다. 외교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바흐가 IOC의 최고 유망주니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얼마 전 한번은 문체부의 김대기 차관이 독일에 가는데 바흐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비서를 통해 있었다. 이에 앞서 필자는 유인촌 장관이 러시아 갈 때 소치에 가있던 스미르노프(Smirnov) 위원을 모스크바로 올라오게 했고, 신재민 차관(당시)이 광주U대회 유치를 위해 하얼빈의 FISU회의에 갔을 때 킬리안(Killian)을 만날 수 있도록 국제전화를 통해 주선해 준 바 있다. 하지만 김 차관과 바흐의 면담은 뮌헨과 평창이 경합하는 상황에서 필자가 주선하는 것이 서로 부담이 될 것 같아 직접 재외공관을 통해 만나도록 권고했다. 그 후 만났다는 말은 못 들었다. 이럴 때마다 비서들이 연락을 하기에 정말 장·차관 부탁이냐 물어보았더니 그렇다 했다. 그러나 바흐와의 면담주선을 안 해준 후에는 문광부의 부탁은 끊어졌다.
2001년 모스크바 IOC총회에서 IOC 위원장 선거 때 필자는 바흐를 지지자로 알고 있었는데 막판에 인상을 쓰고 달려와 이러한 식으로 선거가 혼탁하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당시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 사마란치와 사마란치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자기 나름대로 필자에게 알려준 것 같다.
바흐는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부위원장을 지냈고, 2006년에 다시 부위원장에 당선되었고, 2010년에 연속해서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얼마 전 뮌헨에서 열린 세계사격선수권대회 때는 IOC 위원 30~40명이 몰려갔는데 로게도 거기에 가서 바흐가 2013년 IOC 위원장 선거에서 1순위라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2011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결정과 2013년 IOC 위원장 선거는 별개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나라에 두 개는 안 준다’ ‘대륙순환원칙이 어떻다’ ‘삼수는 어떻다’ 등 자가발전식의 말이 많이 나오는데 정말 그런지 잘 살펴볼 대목이다. IOC는 고차원적인 외교적 발언이 난무하는 사회다.
2003년 필자가 IOC 부위원장이 되기 위해 평창을 방해했다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받고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미국의 ITF계 태권도매체가 바흐에게 질문서를 보냈다. 사실 여부를 질의한 것이었다. 당시 바흐의 답신을 읽어보면 ‘그런 사실도 없고 부위원장 선거와 개최도시는 별개의 문제며, 파운드(Pound)의 위원장 출마와 토론토의 올림픽 유치가 동시에 있었고 더구나 프라하에서의 부위원장 선거는 평창이 떨어진 후에 있었다’고 돼 있다. IOC의 법사위원장을 맡고 있던 독일 법률가의 답신인 것이다. ITF 총재를 맡고 있는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은 지금도 그런 질의서를 보낸 사람이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고개를 흔든다.
2008년 광주가 2013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유치할 때 바흐와 트로거(Troger)에게 독일 교수(FISU 집행위원)에게 우리를 지지하도록 부탁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우리는 너무 늦게 나와 불리했고 킬리안 FISU 위원장의 호의로 다음 대회인 2015년 대회까지 염두에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바흐에게 독일의 함부르크도 2015년 대회를 유치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더니 “2000만 유로 이상 예탁금을 내고 유치하는 것은 내가 허가 안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 그 말대로 광주가 2015년에 재도전할 때 함부르크는 나오지 않았다. 약속도 지키고 실리도 고려한 것이다. 광주는 작년에 쉽게 2015년 유니버시아드 개최권을 따냈다. 킬리안 FISU 위원장도 고마운 사람이다. 광주가 유니버시아드대회를 계기로 국제화되기를 빈다.
▲ 세네갈 대통령에게 올림픽훈장 금장 전수. 두번째 줄에 바흐가 보인다. |
바흐를 보면 우리와 참 다른 것은 3수가 어떻고, 한 나라에 두 개는 안 준다, 대륙순회가 어떻다 등의 근거 없는 상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타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내실을 기하면서 확실한 계산과 판단과 확증에 의해 능률적으로 움직인다. 독일 사람들은 딱딱해 보여도 따뜻하고 지킬 것은 지킨다. 허튼 수작을 한다든가 쓸데없는 짓은 안 하고 아주 확실하다. 향후 한국 스포츠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이런 바흐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싱가포르에서 우리 일간지 기자가 필리핀의 엘리잘데(Elizalde) IOC 위원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같은 이야기였다. 대륙별 순회에 대해서는 “개최 준비 여건이 중요하다”, “일본은 두 번이나 동계올림픽을 하지 않았느냐”는 답이 나왔다. 또 평창은 어떠냐는 질문에는 “준비나 잘하라. 인천에서 철도를 개설한다는 말은 들었다”하며 내실을 강조했다. 귀담아 들을 일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