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어떡해” 통곡하던 그 소년이…
▲ 이 군이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일가족 4명을 숨지게 한 사건 현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새벽 3시 35분경. 성동경찰서 당직실에 화재신고가 접수됐다. 경찰에서 화재가 난 아파트까지는 5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도착했을 땐 현장에는 검은 그을음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방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경찰은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어머니를 애타게 찾는 한 10대 소년을 발견했다. 이 아무개 군(13)이었다. 이 군은 “내가 이 집 아들이다”며 통곡했다. 경찰은 일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 군을 경찰서로 데려가 조사를 시작했다.
이 군은 “홍대 주변에 가서 친구들과 놀다 들어왔다”며 알리바이를 댔다. 이 군의 신용카드를 조회하자 홍대에서 아파트까지 도착한 택시 기록이 찍혀 있었다. 알리바이가 명확하다고 생각한 경찰이 조사를 끝내려던 찰나 이 군의 뒷모습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 홍대에서 새벽까지 놀다 왔다는 이 군의 뒷 머리카락 일부가 불에 그을려 있었던 것이다. 경찰이 추궁하자 이 군은 “아버지(48)를 죽이고 싶었다”며 고개를 떨궜다.
이 군은 왜 그토록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을까. 10월 22일 사건 현장을 찾아 이웃주민들, 사건 담당 경찰을 만나 일가족 모두의 목숨을 앗아간 10대 소년의 범행 전모를 쫓아봤다.
사건 발생 이틀 전. 이 군은 택시를 타고 주유소로 갔다. 이 군의 가방에는 10ℓ짜리 빈 생수통이 담겨 있었다. 빈 생수병에 휘발유를 사서 담아 올 목적이었다. 이 군은 택시기사에게 “수업 시간에 써야 하는데 주유소에서 학생에겐 휘발유를 안 팔 것 같다. 아저씨가 대신 사 달라”고 부탁했다. 택시기사가 거절하자 이 군은 “그러면 휘발유를 사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며 불안한 모습으로 주유소로 들어갔다. 이 군은 이 날 8.5ℓ의 휘발유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구입한 휘발유를 작은 생수병에 조금씩 나눠 담은 뒤 자신의 방 장롱 위에 숨겼다. 이때만 해도 ‘언젠가 저 휘발유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말겠다’는 막연한 계획만이 서 있었을 뿐이었다.
이 군이 이토록 아버지를 증오한 이유는 보도된 것처럼 비단 진로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 군은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엄격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컸다. 이 군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곤 했는데 가정 내에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바라보면서 그의 가슴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군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봉제공장을 인수해 함께 운영해왔다. 그러나 아버지가 후두암 판정을 받은 후부터는 어머니(39) 혼자서 공장의 일을 돌봤다. 이 군의 어머니는 공장일을 하면서 남편 병수발까지 감내하며 하루하루 힘들게 지냈다. 뿐만 아니라 이 군의 집에는 하반신을 못 쓰는 시어머니(74)도 같이 살고 있었다. 이웃주민들에 따르면 이 군의 어머니는 바쁜 와중에도 자주 시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아파트 주변을 산책시켜 주곤 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지극한 효심을 이웃주민들에게 자주 자랑하곤 했다.
이 군은 아버지가 그런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장면을 보면서 자랐다. 어머니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감내했다고 한다. 후두암이 호전된 후에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골프에 심취했다고 한다. 이 군의 아버지는 골프채를 들고 다니며 아파트 주민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골프를 즐긴다. 실력도 프로 선수급이다”며 자랑하곤 했다. 10월 22일 기자와 만난 이웃주민 박 아무개 씨(60)는 “다리 못 쓰는 어머니 돌보랴, 봉제공장 일하랴, 아내가 그렇게 바쁜데 골프나 치러 다니는 걸 보고 주민들이 혀를 끌끌 찼다”고 말했다.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산 다음날(10월20일). 그날도 이 군은 아버지와 진로문제로 다투었다. 아버지는 골프채로 이 군을 폭행했고 뺨을 쿡쿡 찌르기도 했다. 쌓여 있던 분노가 치밀어 오른 이 군은 아버지 살해 계획을 그날 새벽(10월 21일 오전 3시35분경)에 실행에 옮기고 만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만큼 범행도 치밀했다. 머릿속에는 ‘아버지만 죽이고 나머지 가족들은 구출하겠다’는 결심이 서 있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 3시경, 이 군은 아버지가 안방에서부터 탈출할 동선을 예측해 현관문 왼쪽에서부터 휘발유를 뿌리기 시작해 아버지가 누워 있는 안방 가장자리 부근까지 뿌렸다. 휘발유를 처음 써 보는 이 군은 이런 식으로 휘발유를 뿌리면 심지가 타들어 가듯 불이 서서히 안방으로 전해질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현관문에서부터 뿌린 이유는 아버지가 화염을 느끼고 도망 나오려 하더라도 탈출할 수 없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이 군은 불이 안방으로 서서히 번지는 사이 다른 방에서 자고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11), 할머니를 깨워 현관문 오른쪽으로 도망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화염은 이 군의 생각대로 조금씩, 낮게 타오르지 않았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불기둥이 천장까지 치고 올라갔다. 단 몇 초 만에 안방으로 불이 옮겨 붙었다. 순식간에 집이 화염으로 가득차자 겁을 먹은 이 군은 다른 가족들의 방에 접근할 생각도 못한 채 현관문을 열어 둔 채로 줄행랑을 쳤다.
안방에서 잠을 자던 아버지는 화염을 인지하고 급히 방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이 군이 현관문에서부터 불을 지른 통에 밖에서부터 불이 타오르고 있었기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실 문을 닫고 욕조 안에 머리를 숙인 채 위기를 모면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아버지는 그 모습 그대로 사망한 채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 사건담당 경찰은 “부검결과 기도에 가스가 가득 차 있었다.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못 나오게 하려 현관에서부터 지른 불은 오히려 어머니와 여동생의 발목을 잡았다. 아버지의 사체는 그나마 온전한 상태였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이 타버렸다. 아버지와 다른 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현관 쪽으로 다가가려다 화염을 견디지 못하고 즉사한 것. 현관문 옆 문간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 군의 할머니는 혼자 걸을 수 없는 탓에 빠져나올 수조차 없었다. 할머니 역시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사건은 진로문제로 인한 갈등과 부자간의 대화단절이 빚은 비극으로 보도됐지만 진로문제는 사건을 발화시킨 촉매가 됐을 뿐이고 실제로는 심각한 가정폭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구타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증오심을 키워온 아들. 결국 이번 사건의 범인은 십수년간 가슴 깊숙이서 자라온 이 군의 증오심이었던 것이다. 이 군은 경찰조사에서 “끝까지 어머니와 여동생, 할머니는 살려서 나왔어야 하는데 후회스럽다”고 말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