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품 땡처리’ 국물도 안 남기고 쪼옥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형마트만 골라 사기행각을 벌인 ‘마트 전문 갈취 사기단’이 검거됐다. 서 아무개 씨(48) 등 3명은 업주와 매매계약만 체결한 상태에서 운영권을 넘겨받은 후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매장 내 상품과 시설물 등을 헐값에 팔아넘겨 15억 5000만 원 상당을 편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에 개입한 피의자들의 숫자만도 17명이나 된다. 이들은 자금책, 물색책, 해결사, 바지사장 등으로 역할을 분담해 전국 마트를 휘젓고 다니며 사기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피의자들은 마트를 빼앗은 후 원래 업주는 물론이고 직원들까지 지속적으로 협박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의 극악무도한 범죄 방식에 두 명의 중형마트 업주가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 2년 동안 전국 중형마트 업주들을 아연실색하게 한 조직적인 범죄행각 속으로 들어가 봤다.
인천 지역에서 중형마트를 운영하던 정 아무개 씨(43)는 대형마트가 도심 곳곳에 들어서면서부터 오랜 시간 극심한 재정난을 겪어왔다. 마트를 통한 순수익은 고사하고 매달 진열상품에 대한 대금도 제대로 납부하지 못해 빚만 쌓여가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중형마트 사업을 이대로 접을 수도 없었다. 마트를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혹시 누군가 나타난다 해도 그동안 밀린 대금을 한꺼번에 납부할 경제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파리만 날리는 중형마트를 인수하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 왔다. 서 아무개 씨였다. 그는 직장을 그만둔 후 퇴직금으로 뭔가 해보려던 차에 들르게 됐다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정 씨는 솔깃한 생각이 들었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솔직한 상황을 토로했다. 손님이 없어 지금 진열된 물건들도 다 빚이나 다름없다고 고백한 것.
그런데 그냥 발길을 돌릴 줄 알았던 서 씨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자신이 그동안 생긴 채무를 떠안을 것이니 1억9000만 원에 계약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과정이라면 마트 인수 시 몇 배의 자금이 들겠지만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정 씨로서는 그동안의 채무는 물론 계약금까지 당장 건네주겠다는 서 씨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며칠 후 서둘러 서 씨와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서둘러 맺은 계약은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 계약금을 받기로 한 날 서 씨가 아닌 ‘전주 T파’ 행동대원인 이 아무개 씨(34) 등이 마트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정 씨를 창고에 감금한 후 폭행해 겁을 준 후 진열상품 및 시설물 등을 모조리 가지고 나갔다. 이들은 이 물건들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속칭 ‘땡처리’ 수법으로 2억 6800만 원의 부당이득을 올렸다.
첫 시도가 성공으로 끝나자 이들의 사기범죄는 더욱 치밀해졌다. 아예 전국 중형마트 자금 사정을 추적하는 물색책, 사건 발생 후 고소고발 가능성을 제거하는 해결사, 계약과정과 범죄과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게 운영권만 넘겨받는 제3의 바지사장 등이 가담해 모두 17명이 한 팀을 이뤘다.
이들은 모두 전과 5범 이상의 범죄자들이었다. 물색책을 맡은 장 아무개 씨(28) 등 4명이 전국을 돌며 마트 주변 조사를 마치면 서 씨가 업주에게 접근해 감언이설로 상대를 속인 후 매매계약을 맺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소재 N 마트 업주 한 아무개 씨(28) 역시 서 씨 일당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장 씨가 넘겨 준 정보대로라면 업주 한 씨는 당장 가게 관리비도 낼 수 없을 정도의 자금난에 처해 있었고, 잦은 빚 독촉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몇 달 동안 한 씨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았던 서 씨는 딱한 사정을 헤아리는 것처럼 해 3000만 원의 돈을 빌려줬다.
그러나 서 씨는 한 달 후 밀린 이자금까지 모두 8000만 원을 갚으라며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협박하기 시작했다. 한 씨에게 변제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던 서 씨는 자연스레 밀린 비용 대신 마트 매매계약서에 사인하게 했다.
그후엔 운영권을 명의 대여자인 피의자 김 아무개 씨(57)에게 넘겨 자신이 범죄에 개입한 사실을 숨겼다. 한 씨 역시 돈 3000만 원에 전 재산을 모조리 뺏기고 거리에 나앉게 생긴 처지를 비관해 목매 자살한 채 발견됐다.
경기도 안양시의 권 아무개 씨(40) 역시 서 씨 일당으로부터 계약금 2500만 원만 건네받은 후 마트 운영권과 시설물까지 몽땅 도둑맞았다.
같은 방식으로 지난 2년 동안 모두 6개의 중형마트가 서 씨 일당의 범죄에 고스란히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들 중 경찰에 피해사실을 신고한 업주는 없었다. 서 씨 일당이 업주뿐만 아니라 범죄사실을 목격한 직원들까지 사후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서 씨 일당들 중 뒤처리를 담당하는 이 아무개 씨(34)는 피해자들을 지속적으로 협박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뒤처리 담당 이 씨는 전주지역 유명 조직폭력배 행동대원으로 마트 업주와 직원들을 감금하고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씨는 밀린 임금지급 등을 요구하는 마트 직원들을 감금하고, 범죄사실 전모를 알고 있는 강 아무개 씨(47)를 북한강변 저수지로 끌고 가 폭행한 후 “불구로 만들어 버리겠다”며 신변의 위협을 가하는 방식으로 입막음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씨가 물리적으로 입막음을 하면 서 씨는 명의를 대여해 줄 사람들을 물색해 지속적으로 마트 사업자를 변경해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갔다.
11월 5일 기자와 통화한 사건 담당 형사는 “피의자들은 조직적인 범죄행각을 들키지 않기 위해 철저한 역할분담으로 피해자들을 감금한 자, 폭행한 자, 상품을 절도한 자, 불법매매한 자 등 각각의 피해사실에 대한 피의자가 모두 다르게끔 했다”며 “이러한 경우 피해자들이 고소를 해도 개인 간의 민사문제로 변질돼 서 씨 일당 전체를 형사처벌하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 있는데, 이 점을 노린 것 같다”고 말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