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 단위 합의금 놓고 전문경영인 간 협상 결렬…그룹 총수끼리 담판 필요? 소송 승리한 LG ‘굳이…’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일각에서는 총수 회동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양사에는 아직 실현 가능성이 낮은 얘기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왼쪽)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18년 남북정상회담 환영 만찬에 참석한 모습.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정치권이 언급하는 ‘대승적 합의’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양사가 무턱대고 합의를 하면 두 회사 모두 경영진이 배임 리스크를 떠안게 된다. 정 총리도 이를 알지만 중재 이미지를 노린 것 같다.” 양사의 사정을 잘 아는 한 재계 관계자는 정세균 국무총리의 합의 종용을 이렇게 평가했다. 정 총리는 지난 1월 28일과 3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양사의 합의를 촉구한 바 있다.
정치권의 압박에도 갈등의 골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는다. 양사는 미 정부가 조지아주의 고용과 전기차 산업 육성 등을 위해 ITC 판결에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을 두고 장외전을 펼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ITC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한은 오는 4월 11일까지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12일 미국 내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하며 오는 2025년까지 2곳 이상의 배터리 공장을 짓고 5조 원 이상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이보다 앞선 10일에는 김종현 사장 명의로 라파엘 워녹 미국 상원의원 측에 편지를 보내 “외부투자자가 SK의 공장을 인수한다면 LG가 이를 운영하는 데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은 16일 입장문을 내고 LG 측 행보에 강하게 반발했다. SK이노베이션은 “소송의 목적이 SK이노베이션을 미국시장에서 축출하고 독점적 지위를 구축하는 데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이라며 “LG의 무책임하고 도를 넘어선 미 대통령 거부권 행사 저지 활동”이라고 주장했다. 또 “3월 초에도 두 회사 고위 관계자가 만난 적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이 동의한다면 협상 경과 모두를 공개할 뜻도 있다”며 SK가 합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LG 측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나 SK이노베이션은 이사회 차원에서 협상에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11일 이사회 확대감사위원회 회의 결과를 공개하며 “요구조건을 이사회 차원에서 면밀히 검토하겠지만, 미국에서 배터리 사업을 지속할 의미가 없거나 사업경쟁력을 현격히 낮추는 수준의 요구 조건은 수용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SK이노베이션의 장외전에 힘을 싣는 인물은 김종훈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이다. 2019년 3월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된 김 의장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한·미FTA(자유무역협정) 한국 측 수석대표 등으로 활동한 통상 전문가다. 김종훈 의장은 지난 2020년 3월 임기만료를 앞두고 김준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 총괄사장과 함께 연임되며 자리를 지켰다. 김 의장은 최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도 감사위원회에서 언급된 ‘배터리 사업 철수’ 가능성을 시사했다.
LG화학의 소송전을 지휘하는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첫 외부 수혈 인사로 이름을 알렸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이 2019년 12월 9일 서울 강서구 마곡동 LG사이언스파크에서 열린 LG화학·금융기관 공동 2차전지산업 육성 산업 금융 협력프로그램 협약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LG 쪽에선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이 소송전을 진두지휘했다. 2018년 11월 LG화학 부회장으로 영입된 신 부회장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첫 외부 수혈 인사로 이름을 알렸다. 미국 3M 수석부회장이던 신 부회장 영입 후 국제소송전이 진행되면서 재계에서는 인화를 강조하던 LG그룹의 변화에 주목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젊은 총수를 맞이하면서 세대교체한 LG가 고문단이나 원로의 이야기에 예전처럼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말했다.
신학철 부회장은 지식재산권과 특허 분쟁 쪽에 경험이 풍부해 국내보다 증거개시절차가 마련돼 있는 미국, 특히 결론이 빨리 날 수 있는 ITC 소송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 부회장은 LG에너지솔루션 분사 이후에도 LG에너지솔루션 초대 이사회 의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신학철 부회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은 2019년 9월 16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중재해 마련된 양사의 최고경영자 회동에 함께 자리했으나 이날 합의하지 못했다. 이후 지난해 10월 김종현 LG에너지솔루션 사장(당시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이 두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 또한 결렬됐다. 현재까지도 양사는 협상 조건에서 이견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양사 최고경영자의 입지에 타격은 불가피하다. 신학철 부회장과 김종현 사장은 ITC 승소로 우위를 선점했음에도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는 부담이 있고, ITC 소송이 시작된 이후 쭉 자리를 지킨 김준 사장은 패소 전후 합의에 실패해 합의금 규모를 키웠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분쟁 과정에서 지난해에만 각각 6억 원, 7억 원 규모의 로비자금을 지출했다.
일각에서는 총수 회동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는 관측도 나오지만 아직 실현 가능성이 낮은 얘기다. ITC 판결이 나온 터라 SK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해야 할 합의금 규모가 불어난다. 반면 LG는 4대그룹 총수 중 막내인 구광모 회장이 맏형 역할을 하는 최태원 회장과 회담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양사 모두 지주사가 관여된 사안인 만큼 합의 과정에 총수들의 관심도가 높을 것”이라면서도 “ITC 소송에서 승리한 LG는 굳이 총수 회동으로 담판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