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해진 ‘낚시꾼’들 ‘어장’ 주변만 맴맴
▲ 하나금융지주가 외환은행 인수에 뛰어드는 등 M&A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은 지난 16일 전격적으로 론스타와 외환은행 인수에 대한 양해각서(MOU)까지 체결한 사실을 밝혔다. 당초 우리금융 인수의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하나금융이 우리금융 인수의향서 제출 마감시한(26일)을 불과 열흘 앞두고 외환은행 인수로 선회한 것에 대해 시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하나금융을 향한 모든 시선이 우리금융 인수에 쏠려 있었다”며 “외환은행 인수를 발표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현대건설과 외환은행, 우리금융 외에도 최근 국내 M&A 시장의 움직임은 매우 활발하다. 최근 성사됐거나 진행 중인 M&A 건수는 수두룩하다. 업계에서는 내년이 전 세계적으로 M&A 시장이 가장 뜨거운 한 해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인도 마힌드라&마힌드라의 쌍용자동차 인수, 동양그룹의 동양생명 지분 보고펀드에 매각, 유진그룹의 로젠택배 매각, 대선주조의 우선협상대상자로 부산상공계 컨소시엄 결정, 현대성우리조트 인수에 KT&G 인수의향서 제출, 메디슨을 놓고 벌이는 삼성과 SK의 한판승부, 글로벌 통신장비업체 시스코의 유비쿼스를 향한 줄기찬 ‘러브콜’, 풍력부품업체 평산의 독일 자회사 현대중공업에 매각 추진….
최근 국내 M&A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여기에다 대우조선해양, 하이닉스 같이 조 단위가 오가는 ‘빅딜’이 대기하고 있다. 쌍용건설, 서울고속터미널, 카드사를 비롯한 금융권의 ‘스몰딜’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최근 대형 회계법인이나 투자은행에 M&A와 관련한 의뢰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문도 자자하다.
국내에서 이처럼 M&A 시장이 활기를 띠는 까닭은 신성장동력을 발굴하려는 기업과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알짜 회사를 매각하려는 기업의 조건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신성장동력을 찾고 있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M&A는 신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과거와 달리 요즘엔 꽤 알짜 회사도 많이 나온다”고 귀띔했다.
또 높은 가격이 제시되면 운영하고 있는 회사라도 매각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분위기도 한몫한다. 이 같은 현상은 주로 IT업계에서 나타난다. IT업계 관계자는 “젊은 창업자들 중엔 회사 가치를 키워 높은 가격에 매각하는 것을 오히려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고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내 회사’라고 인식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쥐고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예전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거론되는 딜이 모두 올해 안에 마무리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매각하는 입장에서는 빨리 마무리하고 싶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협상과 성사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얼마 전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알짜 계열사를 내놓은 한 대기업 관계자는 “매각을 결정하고 나면 계약이 빨리 성사될수록 좋지만 재무구조개선 등 불가피한 이유로 매물을 내놓은 경우라면 인수하려는 쪽은 그것을 약점으로 이용하려 해 계약이 쉽게 성사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다시 말해 한 쪽은 가능한 한 비싼 가격에 매각하려 하고 다른 한 쪽은 되도록 싼 가격에 인수하려 하는데, 조율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당장 M&A 시장에 투입될 수 있는 자금은 넘쳐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과거처럼 기업들이 마냥 몸집을 불리기 위해 M&A 시장에 뛰어들지는 않고 있다. 아무리 좋은 매물이라도 인수 가격이 맞지 않고 시너지 효과를 보기 힘들다면 군침을 흘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기업들이 찾는 신성장동력은 시너지 효과를 전제로 하고 있다. 지난 5월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한 포스코의 정준양 회장은 “기회가 있다면 거침없이 할 것”이라며 M&A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천명했지만 대우인터 인수 후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현재 M&A 시장에서 강자로 거론되는 기업은 포스코 GS CJ 등이다. 이들 기업은 어마어마한 현금을 쥐고 먹잇감을 노리고 있다. 그동안 M&A 시장에 매물이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거론됐던 롯데는 현재 이들보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미 거둘 만큼 거두어들였다는 평가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롯데가 2007년부터 보여준 왕성한 식욕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며 “롯데의 사업군을 볼 때 나오는 매물치고 안 걸리는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M&A 시장에서 늘 관망자였던 롯데는 2006년 롯데쇼핑의 상장으로 태도가 완전히 돌변했다. 안 그래도 현금이 많은 롯데는 롯데쇼핑 상장으로 확보한 현금을 보태 2007년 대한화재보험 등을 인수하며 M&A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두산주류BG, 기린, AK면세점 등을 인수하며 M&A 강자로 떠올랐다.
롯데는 올해에도 바이더웨이와 GS백화점·마트, 파스퇴르유업 등을 인수했고 대우인터내셔널 인수전에도 참여해 포스코와 맞대결을 펼쳤다. 사업군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이닉스 인수 후보로도 거론될 만큼 무서운 기세였다. 롯데는 M&A에서 보유 현금뿐 아니라 회사채를 발행하거나 차입금을 활용하기도 했다. 한 M&A 전문가는 “인수한 기업을 소화할 시간도 필요하다”며 “더 이상 롯데가 굵직한 인수전에 참여하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나타냈다.
중국·인도·중동 자금도 틈만 보이면 언제든 치고 들어올 기세다. 인도 마힌드라가 쌍용차를 인수한 것이나 이란 가전유통업체 엔텍합그룹이 대우일렉을 인수한 것 등이 좋은 예다. 유럽계 자금 역시 단독 입찰이 아니어도 투자 형식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매물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현금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지만 정작 성사되는 건수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최근 시장의 특징이다. 증권사 M&A 부문 고위 관계자는 “겉으로는 활황처럼 보이지만 실상 불황”이라는 말로 최근 국내 M&A 시장을 평가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금호아시아나그룹 사태를 지켜본 기업들이 M&A 시장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는 매물이 탐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턱대고 뛰어들지는 않는다”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결정한다”고 말했다.
임준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