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상권, 호랑이 피하려다 여우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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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 16일 ‘롯데마트 입점 저지를 위한 강북중소상인대회’에서 지역 중소상인들이 ‘롯데마트 입점 저지’를 위해 결의를 다지고 있다. 연합뉴스 |
11월 10일 통과된 유통법에서는 대형마트와 SSM이 신고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었다. 개점 후 신고만 해도 되는 이전과 달리 일정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등록제로 변경된 것도 중소상인들에게는 고무적이었다. 전통상업지역(시장)의 500㎡ 이내에는 SSM을 개점할 수 없도록 규정한 것도 대형 유통업체에 제약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중소상인들과 시민단체들은 이 같은 규정은 그다지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전국에 전통상업지역으로 지정된 곳이 많지 않을뿐더러 그 외 지역에서는 언제든 자유롭게 SSM을 개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전통상업지역 내에 개점한 SSM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유통법 통과만으로는 대형 유통업체들의 SSM 진출 의욕을 꺾을 수 없었던 셈이다.
유통법과 달리 상생법 개정안은 SSM에 대한 ‘사업조정신청’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대형 유통업체들의 손발을 묶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생법 개정안은 직영점뿐 아니라 대기업이 51% 이상 지분을 갖고 있는 프랜차이즈형 SSM 가맹점도 사업조정 신청 대상에 적용시켰다.
보통 SSM 가맹점을 개점하려면 10억~12억 원의 비용이 든다. 개정 상생법의 규정대로라면 SSM 가맹점을 원하는 상인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5억~6억 원이다. 이만한 비용을 들이는 사람이라면 이미 소상공인이 아니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SSM 가맹점 확장을 노리는 대형 유통업체들은 한결같이 “초기 비용으로 5억~6억 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사업에 쉽게 뛰어들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그만큼 상생법 개정안이 대형 유통업체에 준 타격이 크다는 증거다.
특히 SSM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던 홈플러스의 피해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쌍둥이법이 통과되기 전 중소상인들과의 마찰과 분쟁이 한창 말썽을 일으키자 홈플러스는 프랜차이즈형 SSM 가맹점을 중소상인과의 상생모델로 내세우면서까지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사업에 매진했다. 하지만 쌍둥이법이 통과된 지금, 홈플러스는 사업을 전면 수정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홈플러스 측은 “현재 내년 사업계획조차 세우지 못할 정도로 망연자실한 상태”라며 “시간이 갈수록 손해만 늘어날 뿐”이라고 밝혔다.
다른 업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와 함께 SSM시장 ‘빅3’를 형성하고 있는 롯데슈퍼와 GS슈퍼마켓도 추가 출점은커녕 현재 개점한 매장의 피해를 줄여야 할 판이다. 이에 반해 신세계 이마트의 피해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마트 에브리데이는 전국적으로 17곳에 불과하다. 이마트 관계자는 “처음부터 상권이 겹치지 않는 곳에 출점해왔다”며 “SSM과 관련해 2011년 계획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또 “유통법과 상생법 통과에 이마트 에브리데이는 크게 영향 받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SSM과 관련해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운이 좋다”고 잘라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정 부회장이 이마트의 새로운 사업모델로 SSM을 구상하던 차에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 게다가 경쟁업체들보다 SSM사업에서 뒤처져 있던 이마트는 에브리데이 사업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이마트의 피해를 줄였다는 것이다.
유통법과 상생법은 겉으로는 대형 유통업체의 SSM 진출을 거의 봉쇄하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허점도 적지 않아 대형 유통업체의 SSM 진출과 사업 시도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것이 중소상인 관련 협회와 시민단체들의 주장이다. 대형 유통업체들이 사업계획을 수정할지언정 사업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홈플러스 관계자도 “아직은 사업을 접는다는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선 쌍둥이법에서는 앞으로 개점 예정인 SSM에 대해서만 규제하도록 돼 있다. 이미 개점한 SSM에는 손을 대지 못한다. 중소상인들과 시민단체가 반발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진출할 만한 곳은 이미 다 진출해 있다’는 것. 법안이 발의되고 국회에서 통과되기까지 7개월여를 끈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정치권이 대형 유통업체에 7개월의 시간을 벌어준 셈이라는 것이다. 중소상인들 입장에서는 법안이 통과됐어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강제성이 없다는 것도 중소상인들에게는 불만 요소다. 사업조정신청을 한다고 해서 전부 제재 조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 대형 유통업체가 지역 중소상인과 협의한다면 개점하는 데 문제가 없을 수 있고 사업조정신청조차 제기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이랜드그룹이 운영하는 SSM 킴스클럽마트가 대전시의 ‘사업개시 일시정지 권고’에도 불구하고 11월 16일 대전 법동점을 개점해 물의를 빚고 있다. 킴스클럽마트 대전 법동점은 대전 법동시장과 맞닿아 있고 중리시장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어 중소상인들의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돼왔다. 이에 따라 대전슈퍼마켓협동조합이 개정 상생법에 근거해 사업조정을 신청, 대전시가 ‘사업개시 일시정지’를 권고한 SSM이다. 대전시는 11월 18일 킴스클럽마트 법동점에 ‘권고 미이행 사실’을 공표하고 후속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
킴스클럽마트의 대전 법동점 기습 개점은 상생법에 규정된 사업조정신청의 효력이 얼마나 미약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대전지역 내 중소상인들의 반발에도 아랑곳없이 킴스클럽마트 법동점은 개점, 영업하고 있다. 사업조정신청을 받아들여 권고사항을 내려보낸 지자체(대전시)도 SSM을 별달리 제약할 수 없는 처지다. 기껏해야 합의를 유도하거나 중소기업청에 사업조정심의를 요구하는 정도. 더욱이 대전의 킴스클럽마트 법동점은 상생법이 통과되기 전에 개점해 개정된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법 규정을 대기업에만 적용시킨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대형 유통업체에 막혀 SSM시장에 진출하지 못했던 중소기업이 원활하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꼴이라는 얘기다. 이는 ‘지역 중소상인 보호’라는 법안의 취지와 배치될 우려가 있다. 우여곡절 끝에 통과되기는 했지만 대형 유통업체와 중소상인,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는 유통법과 상생법에는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는 셈이다.
임준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