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팔랴 집 지키랴’ 재채기 연발
▲ 지난 5일 오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외환은행 8000여 명의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하나금융 합병저지 진군대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
외환은행은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현대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고 양해각서(MOU)까지 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흥행과 수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듯해 보였던 외환은행은 그러나 정책금융공사와 우리은행 등 현대건설의 다른 채권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채권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유재한 정책금융공사 사장은 현대건설 인수에 대한 MOU가 체결된 지난 11월 29일 “외환은행이 충분한 합의 없이 MOU를 체결했다. 외환은행의 규정 위반 여부를 법률적으로 검토하겠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뿐만 아니라 올 초부터 현대그룹의 주채권은행으로서 현대그룹에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을 것을 줄기차게 주문해오다 현대건설 인수전에서는 정작 현대그룹의 손을 들어준 데 대해서도 재계 안팎에서 말이 많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어야 한다고 못 박았던 기업에 수조 원에 달하는 물건을 파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비가격 요소를 엄중히 따져보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가격만 고려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도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어야 할 기업이 5조 5100억 원이라는 거액을 써냈다면 면밀히 검토했어야 옳은 것 아니냐”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가격만 보고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한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외환은행의 행동으로 인해 현대건설 인수전의 거센 후폭풍은 불가피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현대건설 매각은 현재 외환은행-채권단, 외환은행-현대그룹, 외환은행-현대차, 현대그룹-현대차 등의 갈등으로 얽히고설키면서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외환은행이 이를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환은행의 일련의 행동에는 대주주 론스타의 속셈이 담겨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대건설 매각을 속히 마무리 짓고 이어서 하나금융에 외환은행 매각을 서두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외환은행을 인수하려는 하나금융지주도 피해를 보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현대차를 중심으로 한 범 현대가가 외환은행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금융에 치중하며 좋은 실적을 거둔 외환은행이 범 현대가의 외면을 받는다면 기업가치가 하루아침에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실적에서도 크나큰 타격을 받게 된다.
하나금융은 외환은행 인수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상태다. 다만 논 바인딩 양해각서(Non-binding MOU)여서 구속력은 그다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즉 계약이 파기된다 해도 물질적 손실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금융 측은 “아직까지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설사 물질적 손실은 없을지라도 인수 실패시 큰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외환은행지부(노조·위원장 김기철)도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노조는 지난 5일 서울 여의도에서 하나금융 합병 저지 집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노조는 “하나금융이 외환은행을 인수한다면 우리나라 금융산업을 위기로 몰아넣고 국민경제를 파탄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조는 6일 “하나금융이 외환은행 인수 금액을 축소해 발표했다”며 “하나금융이 론스타와 계약한 공시금액(주당 1만 4250원) 이외에 추가적으로 주당 850원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확정지급하기로 했음에도 이를 은폐했다”고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므로 하나금융의 실제 외환은행 인수가격은 주당 1만 4250원이 아닌 1만 5100원이 넘는다는 것. 이에 대해 하나금융 측은 “잘못 알려진 것”이라면서도 배당금을 지급하기로 한 사실은 인정했다. 다만 “1주당 850원을 초과하지 않는 것으로 협상했다”고 주장했다.
외환은행 주가는 12월 9일 현재 1만 1000원대에 불과하다. 하나금융이 인수하기로 한 주당 1만 4250원에 훨씬 못 미친다. 여기에다 연말 배당금까지 고려한다면 50% 정도를 더 얹어주는 셈이다. 통상 경영권 프리미엄을 준다는 점을 감안해도 싸지 않은 가격이다. 외환은행 가격이 올라갈수록 ‘하나금융이 론스타의 먹튀를 도왔다’는 비판의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외환은행 직원들도 하나금융이 외환은행을 인수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듯하다. 기업가치에서도 뒤지지 않고 연봉도 외환은행이 하나금융보다 높은 것을 이유로 내부 분위기가 침울하다는 것이다.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 반대운동은 노조와 외환은행 내부에 그치지 않고 전체 노동계로 확산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하나금융도 난감한 상황이다. 당초 우리금융의 유력 인수 후보자로 거론되다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외환은행 인수로 돌변했기에 이제 와서 외환은행 인수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록 구속력이 없을지언정 MOU까지 체결한 상태다. 무엇보다 김승유 회장의 연임 문제가 걸려 있어 인수에 대한 뜻을 쉽게 접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은행은 올 연말 본부장급 이상 임원 인사를 시작으로 정기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다. 부행장 6명과 부행장보 12명이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외환은행 인수 작업 때문에 큰 폭의 인사는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외환은행 인수를 진행해오던 임원들이 인수 후 작업까지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금융 인사의 정점은 당연히 김승유 회장이다. 김 회장의 임기는 2011년 3월 만료된다. 이미 하나금융 회장직을 연임한 김 회장은 외환은행 인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3번 연임을 노리고 있다. 김종열 하나금융 사장, 김정태 하나은행장도 연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외환은행을 성공적으로 인수한다면 그 공을 인정받겠지만 반대로 외환은행 인수가 순조롭지 못하다면 김승유 회장의 연임까지 장담할 수 없다.
이런저런 일들로 외환은행은 연말 우리나라 경제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외환은행이 이익을 더 보려다 곤란한 지경에 빠져버렸다”며 “외환은행이 관련돼 있는 일들이 어떻게 매듭지어지느냐가 연말연초 금융권의 최대 관심사”라고 말했다.
임준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