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가 훔쳤다, 그녀의 실루엣
미국의 문학평론가인 조지 네이선은 ‘자유의 여신상’(The Statue of Liberty)을 변형해 메이 웨스트를 ‘리비도(성욕)의 여신상’(The Statue of Libido)이라고 불렀다. 1893년에 뉴욕에서 태어나 20세기가 시작되기도 전인 다섯 살 때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했던 그녀는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를 차례로 장악하며 청교도적 금욕주의가 억압하는 미국 사회를 비웃었다.
권투선수 출신의 아버지와 코르셋 모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메이 웨스트는 춤과 연극과 노래가 이어지는 보드빌 쇼의 아역 배우로 데뷔한다. 14세 때 그녀의 별명은 ‘어린 요부’(The Baby Vamp). 18세 때 결혼하긴 했지만 실제 결혼 생활은 몇 주 되지 않았고 거의 평생을 독신처럼 지냈다.
영화배우가 되기 전부터 메이 웨스트는 이미 스타였다. 1918년엔 쉬미(Shimmy) 댄스를 선보였는데 다리는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어깨와 상체와 골반만 움직이는 이 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브로드웨이 시절 그녀는 유별난 존재였다. 메이 웨스트는 직접 희곡을 쓸 줄 아는 여배우였고 그녀의 작품은 대흥행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녀의 발칙한(!) 이야기는 검열 관계자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녀는 <섹스>(1926)로 외설죄에 걸려 10일 동안 교도소에 갇히기도 했다. 결국 이 작품은 1999년에 연극으로 리메이크됐다.
메이 웨스트는 마흔 살이 다 되어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늦은 진출이었지만 그 파워는 대단했다. 첫 작품은 <나잇 애프터 나잇 Night After Night>(1932). 함께 출연한 조지 래프트가 “메이 웨스트는 이 영화에서 카메라를 빼고 모든 것을 훔쳤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의 흡인력은 대단했다. 이후 메이 웨스트는 최고의 개런티를 받는 배우가 되었고 파산 직전까지 갔던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를 구해냈다.
걸쭉한 농담을 수시로 내뱉으며 남성들을 거느리는 그녀의 캐릭터는 검열 당국과 항상 충돌을 일으켰다. 라디오 쇼에서 특유의 성적 조크 퍼레이드를 펼치다 출연 금지를 당한 적도 있었다. 보수 언론 재벌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상원의회에서 메이 웨스트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때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웨스트는 1940년대에 영화계를 떠나 좀 더 자유로운 쇼 무대로 옮겨갔다. 하지만 ‘위험한’ 내용을 두려워한 극장주가 종종 쇼를 취소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뉴욕 공연이 취소되었을 땐 예일대 학생들이 항의하며 극장을 부순 적도 있었다.
검열이 느슨해지자 1970년에 다시 영화계로 돌아온 그녀는 85세에 출연한 <섹스테트 Sextette>(1978)를 유작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46년 동안 활동하며 겨우 12편의 영화를 남겼지만 ‘있는 그대로의 섹스’를 드러내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실천했던 그녀는 시대를 비웃었던 냉소주의자였으며 그녀의 농담은 억압된 성 도덕을 해방시켰다. 155센티미터의 작은 키였지만 38-24-38의 놀라운 글래머였던 그녀는 코카콜라 병 디자인에 영감을 주었다.
“여자가 나쁜 길로 갈 때, 남자는 그 뒤를 따라간다” “남자는 내 인생이며, 다이아몬드는 내 경력이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간다. 나쁜 여자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남자를 얻기는 쉽지만 계속 곁에 두긴 힘들다” “남자에게 키스는 서명과도 같은 것이다” “멍청한 남자는 망설인다” “섹스는 행동 속에 있는 감정이다” “남자를 교화시키기 위해 결혼하지 마라. 교화는 학교에서나 하는 일이다” ‘할리우드 명언집’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그녀가 남긴 말들은 남자와 여자, 섹스에 대한 위트 있는 경구들이었다.
이후 수많은 여배우들이 웨스트의 아성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여기서 웨스트가 유일하게 인정했던 섹스 심벌은 바로 마릴린 먼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섹스어필이라는 면에서 마릴린 먼로는 거의 유일하게 나에게 접근했던 여배우다. 다른 여배우들은 그저 가슴이 큰 것들일 뿐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