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이재명 때리기’로 체급 높이기…이재명 ‘정책 차별화’ 이슈몰이…이낙연 ‘문심 잡기’ 행보
인파이터로 변신한 정세균 전 총리는 연일 이재명 경기도지사 때리기에 나섰다. 이재명 지사는 정세균 전 총리 견제구에 아웃복서 전략을 취하면서도 정책 차별화에선 인파이터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선거 참패 책임을 지고 성찰의 시간을 가졌던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움직임도 빨라지는 모습이다.
정세균 전 총리가 4월 16일 오후 이임식을 마친 뒤 정부서울청사를 떠나며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1년 3개월 만에 귀환한 정세균 전 총리 전략은 일종의 ‘체급 높이기’다. 가장 앞선 주자와 각을 세워서 자신의 지지도를 높이는 게 골자다. 백신 수급 대란 과정에서 정 전 총리가 ‘러시아 백신’ 구매를 촉구하는 이 지사를 향해 “중대본(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 잘 안 나오셨던 것 같다”고 꼬집은 게 대표적이다.
이재명 지사가 4월 21일 러시아 백신인 ‘스푸트니크V’ 공개 검증 이슈를 띄운 데 대한 반박인 셈이다. 이 지사는 “국내에서 위탁 생산이 가능한 러시아 백신은 안전성을 검증하면 가격도 싸 대안이 될 수 있는데, 진영대결 때문에 터부(금기)시 됐다”며 “청와대에 검증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개혁보다는 민생이 먼저’라고 외친 이 지사가 정책 차별화를 통해 존재감 드러내기에 나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지사가 청와대에 검증을 요청한 날 러시아 백신 도입 가능성을 점검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지사의 실용주의 승부수가 효과를 봤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블로킹이 발생했다. 직전까지 중대본을 이끌었던 정 전 총리는 4월 22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 “현재 백신 물량은 충분하다. 러시아산 백신 도입은 지난해 보건복지부에서 검토했었다”라며 “지방 정부 수장이라면, 다 알아야 하는 내용이고 보고도 받았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여당의 도지사가 청와대에 대고 얘기할 건 아니다”라고 훈수를 뒀다.
정세균 전 총리는 4월 26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선 “(백신 관련) 내용을 잘 알게 되면 그런 말씀을 하기 어려울 텐데, 그분이 중대본 회의에 잘 안 나오셨던 것 같다”고 꼬집었다. 공개석상에서 연이어 이 지사를 향해 카운터펀치를 날린 셈이다. 정 전 총리 발언은 △코로나 총리 위상 유지 △여권 내부 분열 방지 △국정경험 비교우위 강조 등이 담긴 다목적 포석으로 분석된다.
실제 정 전 총리는 퇴임 직전까지 코로나19 백신 물량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퇴임 전후로 촉발했던 코로나19 4차 대유행은 정 전 총리의 퇴임 시기의 변수 중 하나였다. 정 전 총리나 측근들은 코로나 총리 위상이 흔들리는 데 대한 우려가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와중에 이 지사는 러시아 백신 물량 확보를 주장하면서 정책 차별화를 통한 ‘자기 정치’를 본격화했다. 코로나 총리에 대한 재평가 기회를 날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정 전 총리의 인파인터 기질을 촉발한 요인으로 꼽힌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4월 20일 서울 여의도 글래드호텔에서 열린 청소·경비노동자 휴게시설 개선 국회토론회에서 참석자 소개를 들으며 박수치고 있다. 사진=국회사진취재단
이재명 지사 발언이 자칫 여권 분열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정 전 총리의 인파이터 본능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이 지사의 러시아 백신 물량 확보 주장 직후 “이재명이 문재인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라며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의 전조가 아니라 최종 형태”라고 잘라 말했다.
정부는 정 전 총리가 방패막이를 자임한 지 이틀 뒤인 4월 24일 화이자 백신 2000만 명분의 계약 사실을 브리핑했다. 사실상 정 전 총리 판정승으로 끝난 셈이다. 이 지사는 4월 28일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2021 대한민국 기본소득 박람회’ 개막식 직후 기자들과 만나 정 전 총리 발언에 대해 “경기지사 1시간은 1380만 시간의 가치가 있다”며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정 전 총리의 때리기는 이 지사에 그치지 않는다. 여론조사에서 이 지사와 선두를 다투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해서도 “강적은 아닌 것 같다” “반사이익 측면이 크고 내용물이 없다” “인기로 위기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 등으로 연일 견제구를 날리며 평가 절하했다. 정 전 총리는 그러면서 “실물 경제는 내가 제일 낫다”며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했다.
쌍용그룹(1978∼1995년) 상무이사 출신인 정 전 총리는 문 대통령과 당내 경선에서 맞붙었던 2012년 대선 때도 분수경제론을 앞세운 바 있다. 분수경제론은 서민과 중소기업 등 경제 하층부에 지원을 집중, 아래로부터 효과가 분수처럼 솟구치게 하자는 것으로, 보수 진영의 낙수효과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경제만큼은 정 전 총리가 우위에 있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정 전 총리는 민주당 5·2 전당대회 이후 차기 대선 도전을 공식 선언할 예정이다.
수성 전략에 들어간 이 지사는 정책 차별화를 통한 중도 확장에 나서고 있다. 그는 4월 재보선에서 여권이 패배한 지 12일 만에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실용적 민생개혁 실천에 끊임없이 매진하겠다”고 한 뒤 4월 한 달간 2주택 실거주민 보호, 징병제를 유지하되 모병제 선택 시 높은 보수를 지급하는 선택적 모병제, 경기도 공공기관 이전, 재산비례 벌금제, 지역화폐형 기본소득 등의 어젠다를 던졌다. 정치권 안팎에선 “이슈만큼은 이재명 블랙홀에 여의도가 쫓아가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여권 내부에선 ‘이재명 견제파’와 ‘이재명 옹립파’가 한판 붙었다. 차기 대권 도전을 천명한 97(90년대 학번·70년대 생)그룹 선두주자인 박용진 의원이 이 지사의 2주택 실거주자 보호 발언에 대해 “민주당의 가치를 훼손하는 발언”이라고 폭격했다. 친문계 내부에서도 이 지사의 단독플레이를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 관계자는 “이재명 리스크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재명계 좌장인 정성호 의원은 친문계 견제설에 대해 “그런 흐름은 없다”고 일축했다.
이재명 지사 측은 5월 출범할 가칭 ‘성장과 공정(약칭 성공포럼)’ 의원 모임 출범을 주목하고 있다. ‘이재명을 지지하는 의원 모임’인 성공포럼에는 정성호 의원을 비롯해 김영진 김병욱 임종성 김남국 문진석 의원 등이 합류한다. 특히 호남 의원 중 처음으로 이 지사를 지지한 민형배 의원은 물론, 당내 중진인 노웅래·조정식 의원 등의 합류설도 나돈다. 지난 총선 당시 소상공인 몫으로 들어온 이동주 의원도 합류를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이 지사 주최 행사에 여야 의원 30∼40명이 참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성공포럼 출범이 소수파에서 매머드급 계파로 거듭날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이 지사 측은 성공포럼 출범에 대해 “대선의 시대정신 화두를 설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가격리가 해제된 4월 15일 서울 종로구 자택을 나서던 중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국회사진취재단
재보선 직후 칩거에 들어갔던 이낙연 전 대표는 ‘문심(문 대통령 의중)’을 승부수로 띄웠다. 친문계 적자가 없다는 점을 십분 활용해 포스트 문재인 자리를 꿰차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당 복수 관계자에 따르면 이 전 대표는 4월 15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이낙연계 20여 명과 만난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문 대통령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 절반 이상 2인자를 했는데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은 사기”, “배신할 수 없다” 등의 발언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보선 참패 이후 일각에서 문 대통령과 차별화를 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오자 강한 발언으로 이를 일축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전 대표는 “긍정적인 차별화는 하겠다”는 의중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 전 대표는 재보선 후 이낙연계 인사들을 일일이 찾는 등 스킨십을 넓히고 있다. 올해 초부터 당 내부에서 솔솔 나왔던 ‘주낙야명(낮에는 이낙연·밤에는 이재명)’ 논란을 차단하고 측근들의 이탈을 막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과도 독대도 했다. 이 전 대표는 4월 23일 오전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과 국정현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신 수급 현황과 손실보상제 소급입법 등을 논의했다고 전해졌지만, 재보선 참패에 따른 위로 차원의 독대로 보인다. 이 전 대표가 정치적 잠행을 깨고 대권 기지개를 켰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이 전 대표가 같은 날 오후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내려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것도 대권 기지개의 연장선이다.
이 전 대표는 선거 참패 직후 자신의 SNS를 통해 “당신이 추구하셨던 균형발전과 사람 사는 세상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당 주류에 적극적인 구애를 보낸 바 있다. 일각에서 거론되는 사면 정국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반등의 기회가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있다. 이 전 대표는 올해 초 신년 인터뷰에서 이명박(MB)·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 검토를 주장했다가, 역풍을 맞고 선두체제에서 사실상 이탈했다. 이 전 대표도 민주당 5·2 전당대회 이후 차기 대선 도전을 공식화할 예정이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