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들 3박4일 ‘살인합숙’
2001년 8월 7일 오전 2시 30분경. 통영에서 한창 유선방송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사업가 김 아무개 씨(55)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그는 그날도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복면을 쓴 한 무리의 괴한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김 씨에게 달려들어 김 씨의 머리 등을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김 씨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김 씨는 사건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다. 진단 결과 두개골은 심하게 골절되어 있었고, 뇌에 손상이 가는 등 심각한 상태였다. 장시간의 뇌수술 끝에 어렵사리 생명을 건질 수 있었지만 범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사건 직후 의혹이 가는 인물은 있었다. 사건 발생 하루 전, 김 씨는 통영 지역 조직폭력배 ‘영춘파’의 부두목인 최 아무개 씨(39)에게 사업 확장과 관련해 더 이상 사업을 진행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다. 90년대 두목 이 아무개 씨(52)에 의해 결성된 영춘파는 라이벌 영호파와 함께 통영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폭력조직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 조직은 통영을 거점으로 하고 있지만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추고 막강한 힘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12월 22일 기자와 통화한 경남지방경찰청 담당 형사에 따르면 김 씨는 지역 유선방송사업체 T 사의 대표로 있었다고 한다. 통영과 별다른 연고가 없었던 김 씨는 당시 자신의 T사를 통영지역으로 확대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당시 통영은 지역 개발 바람이 불면서 주변인구 유입이 기대되던 시기로 사업 확장에는 적기였다. 김 씨는 통영과 함께 인근 지역인 마산, 거제, 고성지역 유선방송 업자들과 사업권을 통합하면서 사업을 키웠다.
이러한 외부인의 거침없는 사업 확장이 통영지역 조직폭력배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김 씨의 사업 확장 이전에 통영 지역에는 이미 A 사가 유선방송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영춘파는 A 사 대표 유 아무개 씨와 깊은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경찰은 유 씨가 영춘파에게 일정금액의 활동비를 지원해줬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현재까지 A 사 대표 유 씨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다. 영춘파로서도 자신들을 지원해주는 A 사를 위협하는 T 사의 등장은 큰 타격일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경찰은 영춘파 일당을 유력한 용의자로 꼽았지만 괴한들이 복면을 착용해 정확한 증거를 잡을 수가 없었다. 심증은 충분하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다.
그러던 중 사건이 벌어진 지 9년이 지난 시점에 영춘파에 관한 뜻밖의 첩보가 경찰에 접수됐다. 거제에서 ‘체리마스터’를 개·변조한 불법게임기를 통영·거제 일대 당구장 등에 공급해 높은 수입을 올리고 있던 업자 고 아무개 씨(46)가 영춘파와 영호파 등 지역 조직에 자금을 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의 6개월간 수사 끝에 고 씨는 이들 조직에게 4억 6000여 만 원을 상납한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이들 조직은 안마시술소나 보도방, 성인오락실 업주들이 불법영업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이용해 상당금액을 뜯어낸 사실도 드러났다.
경찰은 최근 한 달간 이들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업에 들어갔고, 조직원 37명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경찰은 이번 검거 작업에서 9년 전 살인미수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영춘파 부두목 최 씨는 검거하지 못했지만 공모 가능성이 큰 영춘파 행동대원 서 아무개 씨(32)를 잡는 데는 성공했다. 경찰은 서 씨를 포함한 영춘파 일당을 9년 전 살인미수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끈질긴 추궁 끝에 결국 혐의 사실을 밝혀냈다.
경찰 조사 결과 9년 전 이들의 범행은 철저히 계획된 것으로 밝혀졌다. 행동대원 서 씨는 경찰조사에서 “자신들의 허락 없이 사업을 확장하는 T 사 대표 김 씨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도 김 씨에게 우리 구역에서 설치지 말라고 경고한 바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범행은 달아난 부두목 최 씨에 의해 계획되었다. 범행 전 이들은 한산도에 위치한 한 민박집에서 3박 4일간 머물면서 합숙훈련을 진행했다. 범행에 참여한 조직원들은 연락조·감시조·작업조로 임무를 분담해 수차례에 걸쳐 김 씨 살해 예행연습에 들어갔다. 사건 당일에는 김 씨의 이동경로와 현장을 미리 둘러보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부두목 최 씨는 조직원 5명을 동원해 김 씨를 살해하려 했으나 범행 완수에는 실패했다.
경찰은 이번 검거를 통해 범행에 가담한 영춘파 일당 9명을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구속했고, 범죄수익으로 추정되는 6억 7000만 원 상당의 부동산을 압류했다. 경찰은 현재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영춘파 두목 이 씨와 범행을 진두지휘하고 달아난 부두목 최 씨 등 혐의자 6명을 검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담당한 경남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번 검거 작업으로 40명이 넘었던 영춘파 조직 자체가 거의 와해된 상태까지 왔다. 큰 성과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한편 9년 전 이들에게 당했던 T 사 대표 김 씨는 사건 이후 피의자의 추가 보복이 두려워 통영에서 사업을 접고 타 지역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