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 뚫고 나온 ‘20세기 모나리자’
파시즘의 이탈리아는 2차대전의 패전국이 되었고 화려했던 이탈리아 영화의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했다. 이때 <무방비 도시>(1945)를 필두로 등장한 네오리얼리즘은 ‘폐허의 미학’으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과 할리우드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탈리아 영화계를 진정으로 부활시킨 주역들은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감독들이 아니라, 아이로니컬하게도 일군의 글래머러스한 여배우들이었다. 실바나 망가노, 엘레오노라 로시 드라고, 지안나 마리아 카날레, 소피아 로렌,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그리고 그 선두엔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있었다.
‘20세기의 모나리자’로 불리기도 했던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1927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영화는 물론 ‘화류계’ 전반에 별 관심이 없었던 미술학도가 대중 앞에 서게 된 건 전쟁이 그녀의 가정에 남긴 상처 때문이었다. 롤로브리지다의 아버지는 가구를 만드는 장인이었는데 전쟁으로 공장은 쑥대밭으로 변했고 생활 전선에 뛰어든 그녀는 처음엔 직접 그림을 그려 팔았지만 나중엔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이후 상금을 노리고 미인대회에 참가하던 그녀는 1947년 미스 이탈리아 선발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다. 스무 살의 롤로브리지다는 그렇게 배우가 된다.
그녀는 2차 대전 이후 유럽에 등장한 최초의 섹스 심벌이었다. 경력 초기부터 ‘유혹하는 여인’의 이미지를 강하게 굳혔던 그녀는 1952년 <팡팡 라튤립>과 <밤의 미인>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올랐고 1953년엔 존 휴스턴 감독의 <비트 더 데블>로 할리우드에 진출해 험프리 보가트와 공연했다. <아름답지만 위험한>(1955) 이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되었으며 그녀의 이름에서 온 ‘라 롤로(La Lollo)’는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미인을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한창 때 37-21-36에 달했던 기하학적 육체는 거의 전설적인 신체 사이즈가 되었고 <노틀담의 꼽추>(1956)의 에스메랄다 역은 그 굴곡을 최대한 살린 캐릭터였다.
그녀가 남긴 또 하나의 전설은 쉼 없는 로맨스였다. 1949년 22세의 나이에 불장난처럼 시작한 사랑으로 의사인 밀코 스코픽과 결혼해 아들 하나를 낳긴 했지만(1971년에 이혼), ‘유부녀 롤로브리지다’의 연애 전선은 항상 뜨거웠다. <트래피즈>(1956)에서 공연한 버트 랭커스터나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1959)에서 함께한 율 브리너와 염문설을 퍼트렸던 그녀는 제리 루이스, 오손 웰즈 등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스캔들에 휩싸였다.
1975년엔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단편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며 카스트로와 잠시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미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도 그녀의 연인이었다. 심장 이식 수술의 권위자인 크리스티안 버나드와도 관계를 맺었으며 뉴욕의 부동산 재벌인 조지 카우프먼과는 결혼설이 나돌기도 했다.
‘로맨스의 여왕’의 진면목은 2006년에 드러났다. 79세였던 지나와 45세였던 스페인의 억만장자 하비에르 리가우의 결혼설이 돌았던 것. 1984년 지나가 57세였고 하비에르가 23세였을 때 만난 그들은 지금도 애틋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올해로 84세가 된 지나 롤로브리지다. 영화계를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올드 팬들의 가슴 속에 ‘롤로’는 젊은 날의 야성을 일깨우는 주문과도 같은 이름일 것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