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부회장이 우리 형’ 낚시질
▲ 사기 혐의 김 씨가 당시 H사의 부회장이었던 형의 직인을 위조한 함바 계약서. 김 씨는 이 가짜 용역권을 브로커를 통해 피해자들에게 되파는 수법으로 부당 이득을 취했다. |
주목할 점은 이 사건은 그의 형이 H 사 고위임원으로 재직할 당시에 벌어졌고, 김 씨에게 함바식당 사기를 당했다는 이들의 제보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요신문>은 1월 12일 피해자 중 한 명인 A 씨를 만나 자세한 내막을 들어봤다.
2008년 2월 A 씨 부부는 지인을 통해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함바용역을 알선·중개하는 브로커 B 씨를 알게 된다. B 씨를 통해 들은 얘기에 따르면 건설현장 인부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함바식당은 고정 수익이 보장되어 있는 알짜배기 사업이었다. 운영권을 따내기만 하면 함바식당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었다. A 씨 부부에게 B 씨는 적당한 함바식당이 있다는 말과 함께 한 곳을 추천했다.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의 재개발 아파트(시공사 H 사) 현장 내에서 운영될 함바식당이 그곳이었다. 현장답사를 한 A 씨 부부는 B 씨와 함께 당시 H 사 부회장의 동생인 김 아무개 씨의 사무실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김 씨를 소개받았다.
문제의 상도동 재개발 현장은 2년 6개월 예정으로 진행되는 대규모 아파트 공사인 데다가 많은 인부들이 동원되고 있어 공사현장 내 함바식당 운영권을 따내기만 하면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임이 틀림없었다. 기존의 유사한 함바식당과 비교해 계산해봤을 때 당시 A 씨 부부가 함바식당을 운영함으로써 기대한 순수익은 8억 원 이상이었다고 한다. A 씨 부부가 대출을 받아서라도 함바식당 운영을 하고자 했던 이유도 확실한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건설현장 내 함바식당 운영권을 따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함바식당 운영권은 겉으로는 공개입찰 방식을 택하면서도 이미 현장 관계자나 건설사의 측근에게 넘어가도록 되어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즉 함바식당 운영권을 놓고 브로커가 개입해 일명 ‘짜고치는 고스톱’이 벌어지는 것은 건설업계의 비밀 아닌 비밀로, 오랫동안 고질적인 병폐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A 씨 부부가 상도동 재개발 아파트 현장 내 함바식당 계약을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다름 아닌 김 씨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씨는 문제의 아파트 시공을 맡은 H 사 부회장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A 씨 부부에게 김 씨는 ‘H 사와 함바식당 용역계약을 한 상태’라고 말했고, 이들 부부는 2006년 8월 21일자로 김 씨와 H 사 측이 맺은 함바용역 계약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06년 11월부터 2009년 5월까지 계약기간으로 명시된 계약서를 확인한 결과 “1식에 3500원, 간식은 2500원으로 한 금액을 매월 25일까지 김 씨가 H 사의 형(2006년 당시)에게 신청하고, 그의 형은 대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 계약서에는 그의 형 직인까지 찍혀 있었다.
김 씨와 B 씨는 상호 용역계약을 맺은 상태였으나 자금부족으로 더 이상 함바식당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어 A 씨 부부에게 함바식당 운영권을 양도, 알선 중개를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김 씨는 2008년 1월 15일자로 B 씨와 위와 동일한 내용의 용역계약을 맺은 것으로 확인됐다. 즉 계약서 내용대로라면 B 씨는 시공사인 H 사와 계약을 맺은 김 씨와 함바식당 운영권을 놓고 다시 계약을 맺은 후 식당운영을 원하는 A 씨 부부에게 되파는, 2차브로커 역할을 했던 셈이다.
A 씨가 상도동 재개발 공사현장을 답사했을 당시 현장은 철거 및 토목공사가 한창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A 씨는 함바집 식당 운영권을 양도하겠다는 이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시공사 사장과 그의 친동생인 김 씨가 맺은 계약서, 그리고 김 씨와 브로커 B 씨가 맺은 계약서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A 씨 부부는 부인 명의로 2008년 2월 11일 B 씨와 함바용역 계약을 맺기에 이른다. 일반 용역계약 금액보다 조금 높은 금액인 1억 6000만 원이었다. 이날 A 씨의 부인은 계약금조로 3000만 원을 김 씨에게 건넸다. 그리고 약 한 달 후인 2008년 3월 14일 B 씨에게 5000만 원을 입금했다. 1억 6000만 원의 계약금 중 8000만 원을 선금 및 계약금 명목으로 입금한 것이다.
하지만 선금을 지불한 지 한참이 지나도 함바식당 운영권은 A 씨 부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김 씨 등은 계약 당시 “2008년 3월 말에는 식당을 개업할 수 있다”고 약속했지만 상황은 달랐다. 시간이 갈수록 아무 진전이 없자 불안해진 A 씨가 재촉했지만 이들에게는 “재개발 현장이라 공사가 지연되고 있으니 좀 기다려보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함바식당을 운영할 가능성은 점점 멀어지는 듯 보였다. A 씨는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아무런 대책도 마련해주지 않자 우리는 피해금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들은 갖은 거짓말로 변제를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급기야 김 씨는 ‘H 사에서 인천에 짓고 있는 아파트 분양권을 주겠다’는 등 전형적인 사기꾼의 수법을 써먹었다. 또 ‘상도동 현장 공사가 미뤄지고 있으니 일단 마산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함바식당을 해보라’는 B 씨의 말을 듣고 또다시 4000만 원을 건넸다가 이마저 날리기도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A 씨는 결국 2008년 말 H 사를 직접 찾아가기에 이른다. 2006년 8월 김 씨가 H 사 측과 맺었다는 함바용역 계약서와 관련, 사실확인을 하고 용역을 맺게 된 과정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H 사 감사실을 통해 사실을 확인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H 사 측에서는 김 씨가 그분의 친동생인 것은 사실이지만 김 씨와 함바용역 계약을 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즉 문제의 계약서는 위조라는 것이었다. 감사실 담당자로부터 계약서가 가짜라는 확인서까지 받아뒀다”는 것이 A 씨의 얘기다.
결국 2010년 3월 A 씨는 김 씨를 경찰에 고소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김 씨가 돌연 자취를 감춰 이 사건은 1년이 다 돼가는 현재까지 기소중지 상태로 별다른 수사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주목할 점은 김 씨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 A 씨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자는 취재도중 김 씨로 인해 함바식당 사기를 당했다는 또 다른 인물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김 씨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경찰의 강도 높은 수사를 촉구하는 한편 H 사 측의 안이한 태도에도 울분을 토하고 있다.
A 씨는 “동생인 김 씨로 인해 피해를 본 인물이 한둘이 아닌데 이를 H 사 측에서 모를 리 없지 않나. 회사 측이 김 씨 개인의 사기행각쯤으로만 여기고 손놓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 씨의 형은 지난해 말 H 사를 퇴직하고 현재 비상임고문으로 재직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1월 12일 기자와 통화한 H 사 관계자는 “고문님의 동생이 함바식당 관련 사기행각을 벌이고 다닌 내용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며 곤혹스런 모습이었다. “이 사건은 김 씨 개인의 사기행각일 뿐 회사와는 무관하다”고 확실히 선을 그었다.
“함바식당 운영권은 모두 입찰을 통해 공정하게 이뤄지고 있다. 또 담당 부서가 관계하는 업무로 김 씨의 형이 당시 고위임원의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마음대로 계약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문제의 함바용역 계약서는 김 씨가 당시 대표이사였던 고문님의 직인을 위조한 것으로 이미 사문서 위조로 판명났다. 2008년 회사 측에서 김 씨를 사문서 위조로 고소해 김 씨는 벌금형을 받았으며 일부 피해자는 김 씨를 사기혐의로 고소하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H 사 측의 설명이었다.
‘김 씨의 사기행각이 형인 김 고문이 H 사 대표이사와 부회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이뤄진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에서 보다 적극적인 조치를 해야 했던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H 사 측은 “이 사건에 대해 고문님도 알고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시 이에 대해 언급한 적도 없었고 회사 측에서도 김 씨가 개인적으로 벌인 일이라 물어보기도 난감했다. 이 일로 회사 측에 괜한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