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도 아닌데 성남·인천서 동시에…
▲ 연쇄 살인 사건의 가짜 범인을 만드는 내용을 소재로 한 영화 <부당거래>의 한 장면. |
2009년 9월 19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절도범 길 씨는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어찌된 일인지 사건을 맡은 분당경찰서는 길 씨가 체포되고 이틀이나 지난 후에야 가족들에게 체포사실을 알렸다. 아들의 체포소식에 놀란 노구의 아버지는 부리나케 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의 입에서 나온 아들 길 씨의 혐의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담당형사는 길 씨가 절도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틀간 조사결과 분당에서 발생한 125건의 절도사건이 모두 아들 길 씨의 소행으로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길 씨가 125건의 혐의를 모두 자백했다는 것이었다.
지난 1월 19일 기자와 만난 길 씨의 아버지는 “당시만 해도 내 아들이 정말 125건의 절도죄 저지른 줄 알았다. 오히려 담당형사가 아들을 걱정해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렇게 길 씨는 검찰에 송치되어 법정에 서게 됐다. 2009년 10월 23일 성남지원에서 열렸던 1심에서 길 씨는 125건의 절도 혐의가 인정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사건을 맡은 성남지청은 경찰의 조서내용을 그대로 적용했다.
길 씨의 아버지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아들은 어려서부터 정신질환을 앓아왔다. 중학교 때부터는 입원과 약물치료를 병행해왔다. 그 때부터 몇 차례 절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돈보다는 병적인 것이었다. 성남에서 범행을 저질렀을 때는 아들을 보살펴온 애 엄마가 사업차 일본으로 떠난 상태였다. 나 역시 교직에 있던 터라 아들을 돌볼 수 없었다. 아들은 당시 누구하나 의지할 수 없는 상태로 심신이 매우 불안정했다. 죄는 인정하지만 아들이 불쌍해 항소심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항소심을 앞두고 분당경찰서 측은 인천에서 발생한 51건의 절도혐의를 길 씨에게 추가했다. 1심서 인정된 125건에 51건이 추가되어, 총 176건의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길 씨의 아버지는 그때부터 담당 수사관의 도움을 받아 경찰의 허위수사를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결정적인 것은 PC방 로그인 기록이었다. 길 씨의 아버지는 “조치원에 위치한 아들의 단골 PC방에 가서 로그인 기록을 협조받았다. 아들의 로그인 시각이 경찰이 뒤집어씌운 사건들 시각과 많이 겹쳐 있거나, 몇 분 차이가 나지 않았다. 범행 장소가 인천이었는데 조치원 PC방에 로그인이 되어 있거나 성남과 인천에서 하룻밤에 절도를 세 차례나 벌였다는 이야기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곧바로 검찰 측에 자료를 넘겼다”고 말했다.
길 씨가 여러 건의 혐의와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데에는 주변의 도움도 컸다. 길 씨가 기술교육을 받고 있는 인력개발원의 담당교수와 같이 수업을 받는 친구들은 출석 자료와 증언을 통해 여러 건의 혐의에 대한 길 씨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줬다.
결국 검찰조사 결과 길 씨의 혐의 176건 중 무려 171건이 길 씨와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길 씨가 실제 절도한 것으로 밝혀진 것은 성남에서 4건, 인천에서 1건에 불과했다.
2009년 11월 12일에 접수된 항소심은 지난 1월 6일 선고가 나오기까지 1년 이상이 걸렸다. 결국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 길 씨는 징역 2년의 원심을 깨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다만 이 사건에서는 몇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최초 길 씨를 체포해 무더기로 미제사건을 뒤집어씌운 조 아무개 형사는 이와 관련해 경고조치 이외에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수원지검 형사 3부 담당검사는 “길 씨의 혐의에 대해서만 수사했을 뿐이다. 담당 형사에 대한 검찰 측의 후속 조치는 현재까지 없다”라고 말했다.
현재 조 아무개 형사는 사건과는 별도로 마약밀매에 협조한 혐의로 구속돼 창원교도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길 씨의 아버지는 “수감 중인 조 형사를 면회한 적이 있다. 아직도 조 형사는 뻔뻔하더라. 아들에 대한 혐의는 사실이라 주장하며 사과조차 안 하더라. 검찰 측에서 이에 대한 후속 조치가 없었던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라며 입맛을 다셨다.
1년 넘게 아들을 위해 뛰어다닌 아버지는 그 새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기자가 찾아 갔을 때 길 씨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그는 “2004년 중풍을 맞고부터 몸이 안 좋았다. 지난 1년간 아들을 위해 참고 뛰어다니다 결국 버티다 못해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담당 수사관을 비롯해 여러분들이 도와줘서 아들이 혐의를 벗을 수 있어 다행이다. 아들 역시 현재 심신이 지쳐있어 요양 중이다”고 말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