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딸들 ‘한판 뜰까요?’
▲ 삼성 이서현(왼쪽)과 롯데 신영자 |
지난 2005년 일본의 ‘유니클로(UNIQLO)’가 들어오면서 국내에 패스트패션이 정식으로 소개됐다. 유니클로의 성공적인 안착 이후 2008년 세계적인 패스트패션인 스페인의 ‘자라(ZARA)’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국내 패션과 유통업계에 삽시간에 패스트패션의 바람이 일었다.
유니클로와 자라는 모두 롯데가 국내에 들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니클로는 일본 사정에 밝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주도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롯데쇼핑은 유니클로를 수입, 판매하고 있는 에프알엘코리아 지분 49%를 갖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인 자라 역시 롯데가 20%의 지분을 참여한 합작법인 자라리테일코리아를 설립해 들어왔다.
유니클로, 자라에 이어 스웨덴의 패스트패션인 H&M까지 가세한 패스트패션은 특히 지난해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며 국내 중저가 패션시장을 점령해버렸다. 백화점들이 패스트패션의 입점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패스트패션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유니클로는 2005년 이후 국내 시장에서 매년 40~70% 고속성장을 하고 있다. 5년 만에 매장 수가 50여 개로 늘어났고 매출은 3500억 원대에 달하고 있다. 24개 매장을 운영하며 국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자라는 이를 발판삼아 일반 패스트패션보다 조금 비싼 패스트패션 브랜드 ‘마시모 두띠’마저 들여와 서울 강남역 인근과 신사동 가로수길에 매장을 열었다. 명동에서 큰 재미를 본 H&M도 매장 수를 점차 늘려갈 계획이다. 이밖에 미국 패스트패션 브랜드인 ‘포에버21’도 국내에 들어와 있다.
현재 재벌가 딸들 중 패스트패션 시장에 가장 큰 의욕을 보이고 있는 이는 서울예고와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 패션에 정통한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이다. 이 부사장이 제일모직에 근무하기 시작할 때부터 의지를 표명했을 정도로 패스트패션 론칭은 이 부사장의 오랜 꿈이었다고 한다.
내년 상반기 론칭을 계획하고 있는 제일모직의 패스트패션은 이 부사장의 지시로 무려 3년 동안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패스트패션 사업팀도 별도로 꾸려져 있다. 여기에는 신세계인터내셔날에서 스카우트한 인력을 포함해 수십 명의 디자이너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짐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이 부사장의 사촌언니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의 ‘청담동 명품패션 장악 본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제일모직 패스트패션 사업팀의 인력은 계속 충원될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전망이다. 이건희 회장도 둘째딸인 이서현 부사장의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서현 부사장의 주도로 론칭할 예정인 제일모직의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제일모직 자회사인 개미플러스에서 맡을 것으로 보인다. 개미플러스는 미국 슈즈·잡화 브랜드인 ‘나인웨스트’를 수입, 판매하던 업체로 지난 2007년 제일모직이 잡화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인수했다.
이처럼 이서현 부사장이 준비 중인 패스트패션이 어떤 모습으로 데뷔할지 패션업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도 패스트패션 론칭을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패션업계 고위 관계자는 최근 “신영자 사장 측에서도 별도로 패스트패션 론칭을 모색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해외 브랜드만 넘쳐나는 현실에서 대기업들이 국내 토종 브랜드를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고 덧붙였다.
유니클로와 자라를 들여와 톡톡히 재미를 본 롯데는 최근 국내 의류업체와 손잡고 패스트패션 ‘컬처콜’을 개발해 올 봄 전국 롯데백화점 내에 매장을 열 계획을 세워놓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평소 롯데는 패션사업에 큰 뜻이 없는 것으로 비쳤다. 신동빈 회장이 유니클로 등을 국내에 들여오긴 했지만 다른 대기업처럼 패션사업 부문에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면세점과 호텔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신영자 사장 역시 명품과 뷰티사업에 관심이 있을 뿐 패션사업에는 큰 욕심을 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지난 연말 명품 패션거리의 대명사 격인 서울 강남구 청담동 인근의 건물을 매입해 주목을 받았지만 이 역시 뷰티사업을 위해 매입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패션업계 관계자들의 말은 다르다. 패션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롯데는 유니클로와 자라를 들여왔고 자체적으로도 패션 PB(자체브랜드)제품을 여러 개 보유하고 있다”며 “이것만 봐도 패션사업에 관심이 많고 언제든 정식으로 뛰어들 여지는 충분하다”고 전망했다.
한편 롯데가 딸을 대표하는 신영자 사장과 삼성가 딸을 대표하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지금껏 두 번의 빅매치를 벌였다. AK면세점 인수전과 루이뷔통 입점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AK면세점 인수전에서는 신영자 사장이, 루이뷔통 입점 전쟁에서는 이부진 사장이 승리한 바 있다.
이서현 부사장이 내년 상반기에 토종 패스트패션 브랜드를 론칭하고 신영자 사장이 컬처콜을 비롯해 또 다른 패스트패션 브랜드를 내놓는다면 삼성가와 롯데가 딸들의 전쟁이 다시 한 번, 삼성 쪽만 ‘선수’를 교체해 맞붙는 셈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신영자 사장뿐 아니라 롯데가 사업영역을 넓히는 데 가장 큰 무기는 백화점을 비롯한 강력한 유통망과 고객층”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신 사장이 패션사업 분야에 적극 진출한다면 강력한 파워가 실릴 것이라는 얘기다.
과연 패스트패션 시장에서 신영자 사장과 이서현 부사장의 한판 승부가 펼쳐질지 패션업계를 넘어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임준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