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숲 해송숲 사이 폐역 활용 ‘블루라인파크’ 낭만 가득…데크길 곳곳 트렌디 식당 ‘밀면 대신 파스타 어때?’
최백호의 노래 ‘부산에 가면’이다. 부산에 간다고 딱히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노래 따라 부산에 간다. 영화에 몰입하듯 허스키한 가수의 목소리에 동화되어 감정이입에 되자 달맞이 고개에도 오르고 싶어진다.
#KTX 타고 폐선 낭만 찾아
기차를 타고 무작정 부산에 내려간다. 예전처럼 기차 안에서 맥주에 과자부스러기나 김밥에 사이다 따위를 먹을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아쉽다. 예전이라고 해봤자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 이전이니 1년 6개월 정도 전이지만 그 사이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기차 안에서 마스크를 잠깐 내리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시절이 됐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뜨니 KTX는 순식간에 부산역에 도착해 있다. 부산역 앞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노래 가사처럼.
‘부산에 가면’ 노랫말을 따라 달맞이 고개로 간다. 부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역까지는 40분 남짓이면 도착한다. 지하철 해운대역에 내리니 폐역이 된 해운대 기차역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반도 남쪽 오른쪽 끄트머리에 있는 옛 해운대역.
5년 전쯤이었나. 해운대역이 아직 폐역이 되기 전 부산역이 아닌 해운대역으로 무궁화호를 타고 털털털 6시간이나 걸려 부산까지 온 일이 있다. 빠르게 돌아가는 모든 것에 저항하듯 애써 무궁화호만 타고 싶었던 그때는 꼭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아도 좋다고, 긴 기차여행 자체가 여행의 전부여도 좋다고, 언젠가 유라시아 횡단열차가 개통된다면 그 시작은 서울역이 아니라 해운대역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역은 이제 바다와는 좀 더 떨어진 신해운대역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하루 두 번 새벽 6시 50분과 오후 2시 50분에 서울에서 신해운대역까지 가는 무궁화호 기차가 있다. 청량리에서 출발해 양평과 원주, 제천, 안동, 경주, 울산 등을 거쳐 해운대역까지 6시간 걸린다. 주머니 사정 가볍고 기차의 낭만을 좀 더 누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궁화호를 타고 떠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4.8km 폐선 활용한 블루라인파크
해운대역에서 해운대해수욕장을 지나 미포까지 오면 이내 달맞이고개로 접어든다. 고층 빌딩숲 배경 삼은 해운대 스카이라인과 소나무숲이 어깨를 나란히 한 달맞이고개 바로 밑에 미포철길이 있다. 차가 다니는 언덕 위 고갯길이 아니라 옛 철길인 미포철길을 따라 새로 만든 산책로를 걷기로 한다.
미포철길은 미포에서 청사포와 구덕포를 지나 송정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5km 남짓의 철길이다. 동해남부선 옛 철길 구간이자 미포에서 송정역을 잇는 이 철로는 1935년에 건설됐다. 포항에서 경주와 울산을 거쳐 부산을 잇는 이 철길은 일제의 자원 수탈과 일본인들의 해운대 관광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엔 동해남부선으로 2013년까지 서민들의 교통수단 역할을 했다. 그러던 것이 복선 전철화의 어려움으로 인해 새 선로로 이설되면서 기존 선로는 폐선 되고 그 자리에 산책로가 들어섰다.
제 기능을 다하고 난 뒤 기차가 다니지 않아 잡풀이 자라던 철로는 2020년 10월 시민과 관광객을 위한 해변열차와 그 곁의 데크길로 새로 꾸며졌다. 한동안 아는 사람만 아는 옛 철로 산책길이었지만 해안에 접한 철길이었던 탓에 풍광이 아름다워 그냥 폐선으로 내버려 두기에는 아까운 곳이었다. 철로를 따라 새로 만든 공원의 이름은 블루라인파크다. 블루라인파크는 옛 동해남부선인 해운대 미포에서 송정역까지 4.8km의 폐선을 활용해 단장됐다.
미포에서 송정까지 데크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탁 트인 하늘과 장쾌하게 뻗은 바다, 세월이 묻어 있는 구부정한 해송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만끽한다. 미포에서 데크길 따라 걷다 보면 청사포 전망대가 나온다. 청사포 다릿돌전망대라 불리는 곳엔 아찔한 스카이워크가 설치되어 있다. 높이 20m, 길이 72.5m로 바다 위 전망대다. 바다 위로 높이 세워진 전망대 끄트머리엔 투명 바닥이 설치되어 있어 발 아래로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다. 전망대부터 송정까지의 구간은 해송과 바다를 두루 누리는 1.9km의 힐링로드다.
블루라인파크에는 데크산책로 외에도 해변열차와 캡슐열차가 있다. 해운대 바다열차는 미포역에서 출발해 달맞이터널∼청사포∼다릿돌전망대∼구덕포∼송정 구간을 왕복 운행한다. 시속 15km로 움직이는 열차는 편도 25분 정도 걸리는데 1만 3000원짜리 자유이용권을 사면 중간에 자유롭게 내려 주변 여행지를 둘러보고 다시 탈 수 있다. 통창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앉을 수 있는 구조다. 해운대 바다를 만끽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바다열차 위로는 귀여운 모양의 스카이캡슐이 시속 4km로 느릿느릿 공중 레일을 오간다. 미포에서 청사포까지 2km 구간만 자동으로 운행한다. 스카이캡슐에서 감상하는 해안절경은 새로운 재미다.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마침내 송정해수욕장에 도착하면 여긴 또 다른 세상이다. 여기는 서핑메카다. 아직 초여름인데 바다 위에 빽빽하게 떠 있는 서핑보드들은 저마다의 파도를 따라 자유를 탄다.
송정해수욕장 주변 분위기도 예전과는 다르다. 데크길 중간중간 바다를 바라보고 자리한 트렌디한 식당과 카페들을 그냥 지나치기는 영 아쉽다. 그동안 부산에 오면 숙제처럼 먹었던 돼지국밥이나 밀면 대신 바다를 바라보고 운치 있게 놓인 평상이나 분위기 있는 씨사이드 테이블에 앉아 너도나도 파스타와 태국음식을 먹는다.
KTX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와 폐선이 된 철로를 찾아온 아이러니한 여행, 세련되게 변했지만 옛 모습을 아련하게 품은 미포철길 위에선 옛 모습 대신 2021년다운 낭만이 흐른다.
부산=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