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관찰·재판 등 변수 산적한 가운데 해외사업 주력 전망…정부 “취업 승인은 고려한 바 없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복귀에 쏠리는 눈
이재용 부회장이 출소했다고 곧바로 경영 일선에 복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별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에 따르면 5억 원 이상 횡령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형 집행 종료 후 5년 동안 관련 기업에 취업할 수 없다. 가석방은 조건부 석방 개념이므로 특경법의 취업제한 규정이 유지된다. 이재용 부회장의 형 종료일은 2022년 7월이므로 공식적으로는 2027년 7월에야 삼성전자 취업이 가능하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활동을 위해 삼성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현재처럼 무보수 미등기 임원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취업은 임금을 목적으로 한 근로계약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보수 근무는 취업으로 볼 수 없다는 논리다.
이재용 부회장은 2019년부터 무보수 미등기 임원으로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고 있다. 보수는 받지 못해도 COO로서 활동이 가능한 것이다. 비슷한 예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14년 횡령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만 무보수로 재직하면서 회장직을 유지했다. 당시 최 회장을 둘러싼 논란이 적지 않았지만 2015년 8·15 사면 이후 수그러들었다.
보수 수령 여부가 취업의 기준이 되는지는 논란이 되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는 이재용 부회장을 취업제한 위반으로 고발할 뜻을 내비치고 있다. 한 시민단체 소속 변호사는 “특경법의 취업제한은 단순히 경제적 보수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회사의 업무나 의사결정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규정”이라며 “무보수 임원이면 취업이 아니라는 주장은 입법 취지를 왜곡하는 부당한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재계에서는 무보수 미등기 임원으로서는 경영 활동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본다. 재계 관계자는 “단순 부회장직을 맡는 것과 이사회 일원으로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며 “적극적으로 오너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경영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전했다.
현재 삼성전자는 이사회를 중심으로 한 집단경영체제로 운영된다. 김기남 DS 부문 부회장, 김현석 CE 부문 사장, 고동진 IE 부문 사장, 한종희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사장, 최윤호 경영지원실장 사장, 이 5명으로 구성된 경영위원회에서 주요 사안을 결정하고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을 내린다. 삼성전자 이사회는 이 5명의 경영위원과 6명의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미등기 임원 신분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이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활동을 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특경법의 ‘법무부 장관의 승인을 받은 경우 취업제한 해제가 가능하다’는 예외조항을 활용하는 것이다. 김정수 삼양식품 총괄사장은 2020년 1월 횡령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됐지만 법무부의 승인을 받아 2020년 10월 경영에 복귀했다.
경제계에서도 정부에 이 부회장의 취업제한 해제를 요구하면서 힘을 실어주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중기중앙회)는 논평을 통해 “이재용 부회장이 취업제한 규정으로 정상적인 경영 활동이 어렵게 된다면 가석방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박범계 법무부 장관에게 이 부회장의 취업제한 해제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범계 장관은 지난 12일 “취업 승인은 고려한 바 없다”고 일축했다.
#일단은 해외 네트워크 강화?
공교롭게도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의 가석방 결정 후 상생 행보를 보인다. 삼성전자는 지난 10일 삼성 희망디딤돌 전북센터 개소식을 열었고, 11일에는 삼성전자 사내식당 6곳에 대해 경쟁 입찰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해당 식당은 과거 삼성웰스토리와 수의 계약했던 곳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6월 부당 내부거래 혐의로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
이어 12일에는 노동조합 공동교섭단과 첫 단체협약을 체결했다(관련기사 삼성전자 노사, 첫 단체협약 체결). 삼성전자 노조 한 관계자는 “몇 주 뒤에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사측은 가능하면 지금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내부 경영진의 변화는 당분간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에 전념하기 어려워 일단은 현 체제를 유지할 것이라는 예측이 적지 않다. 이 부회장은 매주 목요일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 의혹 관련 재판에 출석 중이다. 또 이 부회장의 프로포폴 불법 투약 혐의 관련 재판도 오는 8월 19일부터 열린다. 이 부회장이 삼성 경영과 관련한 일정을 정할 때 재판 일정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삼성은 계열사별로 독립경영을 하고 있고, 정기 인사 시즌도 아닌데 굳이 임원진을 새로 꾸려서 구설에 오를 필요는 없어 보인다”며 “다른 기업의 사례를 봐도 회장이 복귀한다고 임원진이나 이사회에 바로 변화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한화를 롤모델로 삼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올해 2월 미등기 임원으로 경영에 복귀해 현재 (주)한화, 한화솔루션, 한화건설, 세 곳에 적을 두고 있다. 김 회장은 복귀 후에도 이사회 활동은 하지 않고, 네트워크를 활용해 그룹의 큰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그룹 측은 “계열사들의 일상적인 경영활동에 관여하기보다 그룹 전반에 걸친 신성장동력 발굴과 해외 네트워크를 통한 글로벌 사업 지원 역할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도 이재용 부회장을 통한 해외 사업 확대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도 이재용 부회장의 해외 네트워크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논평을 통해 “글로벌 생산 현장 방문 등 경영 활동 관련 규제를 관계부처가 유연하게 적용해주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해외에서도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기대는 높다. 미국 통신사 블룸버그는 “이 부회장의 삼성 복귀는 미국에 170억 달러를 투자하는 계획이나 대규모 인수합병과 같은 주요 계획의 신속한 처리를 이끌 수 있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이재용 부회장이 가석방 신분이라는 점이다. 법무부는 지난 11일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보호관찰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보호관찰 대상자는 주거지를 이전하거나 1개월 이상 국내외 여행을 하려면 보호관찰관에게 신고해야 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가석방은 해외출장 제약 등 여러 부분에서 경영활동에 어려움이 있다”고 밝혔듯 보호관찰로 인해 이재용 부회장의 해외 출장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그러나 박범계 장관은 “외국에 나갈 때 허가를 받는 게 아니고, 신고만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13일 출소하면서 “국민 여러분께 너무 큰 걱정을 끼쳐드렸다”며 “저에 대한 걱정, 비난, 우려, 큰 기대를 잘 듣고 있다. 열심히 하겠다”라고 전했다. 향후 경영활동 계획에 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이재용 부회장 가석방, 국내 투자로 화답할까
청와대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가석방에 대해 ‘국익을 위한 선택’이라는 입장을 내비쳤다. 재계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석방을 주장한 주요 이유는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삼성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15년 사면된 후 SK하이닉스는 향후 10년 동안 46조 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SK하이닉스는 2015년 경기도 이천시에 반도체 공장 M14를 설립했고, 2018년 충청북도 청주시에 M15, 올해 2월 이천시에 M16 등 생산시설 3곳을 구축하면서 일자리 창출에 기여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총수가 부재하면 공격적인 투자나 인수합병(M&A)에 나서기 쉽지 않으며 삼성전자도 겉보기에는 매출이 늘었지만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놓쳤다”며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공백이 길어지면 당장 삼성에 큰 영향은 없어도 장기적으로 여러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전했다. 삼성전자도 지난 7월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핵심 역량을 보유한 기업에 대한 전략적인 M&A는 필요하다고 본다”며 “올해 1월 발표한 대로 3년 내 의미 있는 규모의 M&A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재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투자에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2030년까지 총 171조 원을 반도체 관련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 후 미국에 170억 달러(약 19조 7800억 원) 규모의 제2파운드리 공장을 짓겠다고 밝혔다. 아직까지 공장 부지조차 결정되지 않았지만 이 부회장의 가석방 후 공장 건설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반도체 생산시설도 확충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정·재계가 요구한 일자리 창출로 이어져 가석방에 대한 논란을 어느 정도 희석시키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올해 초 평택시 반도체 공장 신축라인 건설 현장을 점검한 것으로 보아 국내 투자에도 관심이 있어 보인다”며 “삼성이 밝힌 171조 원 투자는 시장 상황을 보면서 결정할 문제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역할이 클 것”이라고 전했다. 이밖에 인공지능(AI), 5G, 전장 등도 삼성전자의 투자 대상으로 거론된다.
아직까지 삼성의 공식 발표는 없지만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다양한 M&A 후보군과 투자 사안을 놓고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앞의 재계 관계자는 “주체가 삼성이니만큼 내용이 잘못 알려지면 여파가 워낙 크기 때문에 철저히 보안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