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 실명계좌 발급 미루자 거래소들 전전긍긍…금융당국, 은행 앞세워 손 안 대고 코 푼 격
지난 8월 20일 기준 FIU에 요건을 갖춰 사업자 신고서를 제출한 곳은 ‘업비트(두나무)’가 유일하다. 신고에 앞서 거래소들은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등의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업비트를 제외한 거래소들은 FIU에 가상자산사업자 신고를 위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실정이다.
ISMS 인증은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 정보시스템의 보호조치가 기준에 적합한지 검증하는 절차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8월 25일 기준 ISMS 인증을 획득한 곳은 21개사, 획득하지 못한 곳은 42개사다. 미획득 거래소 중 신청도 하지 않은 곳은 15곳이다. 인증 획득에만 3~6개월이 소요되는 만큼 15개 거래소들은 폐업해야 한다.
#실명계좌 확보에 속 타는 거래소들
문제는 실명확인 입출금계정(실명계좌) 발급이다. 계좌를 발급해주는 은행들이 다소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 거래소들은 속이 탄다.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와 제휴한 업비트는 실명확인 입출금계정을 발급받았지만, NH농협은행과 제휴한 ‘빗썸’과 ‘코인원’, 신한은행과 제휴한 ‘코빗’은 아직 실명확인 입출금계정을 발급받지 못한 상태다.
실명계좌 발급을 앞두고 분위기는 더욱 악화하고 있다. ‘코인빗’은 지난 1일 돌연 원화 입금을 중지한다고 밝혔다. 제휴하고 있는 신한은행이 특금법 등 관계법령을 이유로 코인빗의 법인계좌 입금정지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NH농협은행은 가상자산 전송시 송‧수신자의 정보를 모두 수집하도록 하는 ‘트래블 룰(Travel rule, 자금이동규칙)’ 시스템 구축을 제안했다. 금융위원회에서도 내년에 살펴보겠다는 트래블 룰을 은행이 갑자기 요구하자 거래소들이 난감해하고 있다.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한 거래소들은 원화 거래를 할 수 없다. 코인 간 거래(CTC)만 가능해지는데, 원화를 다루는 거래소보다 경쟁력이 떨어져 영업이 어려워질 수 있다.
반면 케이뱅크는 업비트와 제휴를 통해 상당한 수익을 거둔 만큼 업비트의 실명계좌 발급을 적극 도운 것으로 보인다. 케이뱅크는 올해 상반기 당기순손실 약 84억 원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5억 원 개선된 수치다. 올해 상반기 코인 투자 열풍으로 국내 업계 1위 규모인 업비트의 이용객이 늘며 케이뱅크도 덩달아 큰 수익을 거둔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NH농협은행과 신한은행 등 ‘전통 은행’으로 분류되는 은행들과 제휴한 거래소들은 사정이 다르다. 이들 은행은 ‘레거시 금융’ 특성상 보수적인 분위기도 있고 거래소에서 얻는 수수료 외에 다른 수익 모델을 충분히 갖춘 만큼 실명계좌 발급에 소극적인 것으로 관측된다.
시중 은행들은 거래소들의 실명확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부담된다고 말한다. 은행권에서는 “계좌를 발급했는데 향후 거래소에서 어떠한 사고가 생기면 은행에 ‘감독 소홀’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당장 수수료 수익은 얻겠지만 덩달아 붙는 리스크는 감당하기 두려운 것이다. 소규모 가상자산거래소 관계자는 “큰 거래소라면 어떤지 모르겠지만 작은 곳은 은행에서 만나주지도 않는다”며 “가이드라인을 잘 맞춰서 ‘잘하고 있으니 평가해달라’고 사정을 해도 평가받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압박하는 금융당국…머뭇대는 은행들
4대 시중은행 중 KB·하나·우리은행은 거래소 실명계좌 발급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은행권이 금융당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한 주요 가상자산거래소 관계자는 “당국에서 단 한 번이라도 가상자산에 긍정적인 시그널을 준 적이 있었나”라며 “가상자산 시장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니 은행들도 이를 의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고승범 신임 금융위원장은 지난 8월 25일 가상자산에 대해 “금융자산으로 보기 어렵고 화폐로서도 기능하기 곤란하다”며 부정적인 인식을 내비쳤다. 가상자산 투자를 ‘잘못된 길’이라고 표현했던 은성수 전 금융위원장도 자신의 발언에 대해 8월 30일 “(시장이 과열되자) 마음먹고 한 경고였다”고 했다.
은행에 책임을 넘긴 금융당국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도 나온다. 가상자산업계 한 관계자는 “애초에 9월 24일이 물리적으로 빠듯한 시간은 아니었는데 은행이 실사를 미루며 시간이 촉박해졌다”며 “사기업이 다른 사기업을 실사하는 이상한 상황인 데다 은행들은 정확한 지침도 갖추지 못한 채 중구난방”이라고 토로했다. 앞의 주요 가상자산거래소 관계자는 은행의 실명계좌 발급이 어려워진 상황을 두고 “과연 금융당국이 예상 못 했겠나”라며 “결국 은행을 앞세워 ‘손 안 대고 코 풀기’ 한 꼴”이라고 말했다.
#특금법 이후 독과점 형성될까
현재 업비트 중심의 ‘1강다약’ 구조는 오는 24일 신고기한이 지나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FIU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많은 거래소들은 제외되고 극소수 거래소만 살아남아 향후 수수료를 인상하는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야권에서는 신고기한을 연장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조명희 국민의힘 의원은 가상자산사업자 신고기한을 내년 3월 24일까지로 연장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고승범 위원장이 “이용자 피해가 더 늘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일정을 지키는 게 맞다”며 선을 그었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