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합의금·법인세 마련 등이 목적, 경쟁력 강화보다 재무구조 개선 치중 지적…현대 “장기 체력 강화”
현대중공업그룹의 건설기계 부문 중간지주회사 현대제뉴인은 지난 8월 25일 기업설명회에서 현대두산인프라코어의 8000억 원 규모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9월 10일에는 증권신고서를 제출해 유상증자 일정을 확정했다. 유상증자 소식은 주가에 직격탄이 됐다. 7월 말 1만 8000~1만 9000원이었던 현대두산인프라코어 주가는 현재 1만 원 전후 수준이다. 시가총액 역시 8000억 원대로 유상증자 규모와 엇비슷하다.
금융투자업계에서 현대두산인프라코어의 유상증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이번 유증의 주된 목적 때문이다. 현대두산인프라코어는 자회사 DICC(두산인프라코어차이나) 재무적 투자자들과의 소송을 마무리하기 위한 합의금 3050억 원, 현대두산인프라코어 분할 및 인수와 관련한 법인세 2000억 원 등을 지불하기 위해 유상증자를 한다고 설명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현대중공업 인수를 계기로 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할 때 영업 외 사유로 유상증자를 실시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신제품 개발 자금은 후순위 배정
투자자들의 불만을 인지했는지 현대두산인프라코어는 조달하는 자금 중 일부를 신제품 개발에 쓰겠다고 밝혔다. 현대두산인프라코어는 유상증자 관련 증권신고서에서 “유상증자를 통한 공모 자금 중 1950억 원은 건설기계 신제품 개발, 신규 엔진 개발 등을 위한 신사업 및 전략적 투자자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라며 “상품성이 향상된 제품 개발을 통한 매출 확대와 신규 제품 개발, 시장 진입 등을 통해 점유율 향상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문제는 신제품 개발 자금이 후순위로 배정됐다는 점이다. 현대두산인프라코어는 DICC 주요 주주들에게 지급하는 3050억 원과 법인세 2000억 원, 채무상환자금 1000억 원 등 총 6050억 원을 사용한 후 나머지 1950억 원을 신제품 개발이나 영업망 확충에 사용할 계획이다. 즉, 유상증자가 흥행에 성공해야만 신기술 개발 여력이 생기고, 조달 자금이 줄어들면 신제품 개발 여력은 감소한다.
현대두산인프라코어가 발표한 유상증자 가격은 주당 6950원이다. 현 주가인 1만 원과 비교하면 아직 가격 매력은 있다. 하지만 발행하는 주식이 1억 1510만 7913주에 달하기 때문에 유상증자 직전에 다시 한 번 주가가 급락할 수 있다. 현대두산인프라코어는 5 대 1 비율의 무상감자도 진행 중이다. 10월 중 감자를 완료하면 주식 수와 자본금이 5분의 1로 줄어드는 만큼 주가가 변동될 가능성이 높다. 현대두산인프라코어 유상증자 신주배정기준일은 11월 4일로 이날까지 주식을 보유하면 보유주식 1주 당 1.159주를 배정 받는다.
증권가는 부정적인 의견을 넘어 실망스럽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삼성증권은 ‘DICC 지분 인수와 자본확충 계획, 예상치 못한 전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현대두산인프라코어에 대한 투자의견을 ‘매수(Buy)’에서 ‘중립(Hold)’으로 낮췄다. 한영수 삼성증권 연구원은 “DICC 지분 인수 외에도 법인세로 현금 소요가 증가했고, 자본 훼손에 따른 재무비율 개선 유인까지 발생했다”면서 “유상증자 규모가 8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 투자자는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글로벌 메이저 '큰 그림' 어디에
현대중공업 계열사인 현대건설기계와 현대두산인프라코어를 합치면 글로벌 상위권 건설기계업체가 된다. 영국 KHL이 지난 5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대두산인프라코어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은 3.7%로 10위, 현대건설기계는 1.2%로 21위다. 두 회사의 점유율을 합치면 5위인 중국 줌라이언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중복되는 자금만 줄여도 시너지 효과는 클 것으로 보인다. NICE신용평가는 지난 8월 31일 현대두산인프라코어에 대한 신용등급을 BBB에서 BBB+로 상향 조정하면서 양사 간 시너지가 기대된다고 분석했다. 최재호 NICE신용평가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과거 경쟁관계에 있었던 현대건설기계가 계열사로 전환됨에 따라 국내 독점적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며 “국내외 영업망 효율화를 비롯해 연구개발, 부품조달 등의 측면에서 시너지 효과 창출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국내 1, 2위 업체 간 결합으로 인한 비용 절감보다는 보다 큰 그림을 제시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업망 통합으로 인한 비용 절감 정도에 만족한다면 각종 논란을 무마하고 기업결합을 승인한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만 우스운 꼴이 된다는 평가도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기업의 미래보다 재무구조 개선에만 집중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최근 현대중공업을 상장시켰고, 현대오일뱅크 상장도 준비 중이다. 이후에도 현대글로벌서비스, 현대삼호중공업, 현대로보틱스 등의 상장이 예상된다. 현대제뉴인 역시 KDB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한 만큼 언젠가는 상장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IB(투자은행) 업계 한 관계자는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중공업 상장으로 1조 원을 조달했고, 현대두산인프라코어를 통해서도 수천억 원을 마련할 예정”이라며 “그룹 차원에서 미래 먹거리보다는 재무구조 개선에 치중하는 듯한 인상이 있어 기업가치 측면에서는 다소 우려되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첫 기업설명회에서 유상증자부터 발표한 것도 못내 아쉽다”고 꼬집었다.
이와 관련, 현대제뉴인 관계자는 “현대두산인프라코어를 1~2년 운영할 것은 아니므로 지금 재무구조를 개선해야 장기적으로 뛸 체력이 갖춰진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대주주로서 현대두산인프라코어 지분율만큼 유상증자에 참여할 예정이고, 초과청약분에 대해서도 참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민영훈 언론인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