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때면 찰거머리… 집에 좀 보내줘요ㅠㅠ
▲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한 장면. |
돌싱 상사는 아무래도 티가 나게 마련이다. 가만히 있어도 다르지만 본인이 나서서 티를 내면 부하직원들이 눈치를 보게 된다. 배려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외식관련 회사에 다니는 L 씨(31)도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저희 사무실에도 ‘싹쓸이’라는 별명을 가진 돌싱 부장님이 있습니다. 외식업체다 보니 여러 관계사에서 시식용 샘플이 올 때가 많아요. 명절 때는 먹을거리 선물도 많이 들어오죠. 그럴 때마다 부장님이 걷어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예요. ‘애들이 좋아해서’라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더라고요. 먹는 것뿐 아니라 전시 상품 샘플이나 경품용 샘플 등 모두가 탐내는 그런 물건은 당연히 ‘혼자 되신 부장님 몫’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어서 하나라도 욕심냈다간 눈치가 보여요.”
교육업체에 근무하는 S 씨(33)도 퇴근할 때마다 돌싱 상사의 눈치를 보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애들은 어느 정도 컸고, 돌싱이라 집에 일찍 갈 필요가 없다보니 자꾸 부하직원들을 붙잡는단다.
“처음에는 퇴근 후 혼자 보내시는 게 안쓰러워서 몇 번 술자리를 같이 했어요. 가면 늘 똑같습니다. 안사람이 없는 게 처음에는 자유롭지만 나중에 애들도 크고 나면 적적하고 후회된다는 말이죠. 공감하면서 맞장구도 쳐드리고 했어요. 그런데 이게 매일입니다. 집에서는 일찍 안 들어온다고 성화고. 퇴근할 때가 되면 본부장님이 ‘이번에는 낙지를 먹어볼까?’ 하면서 운을 띄우세요. 다들 그러면 고개 숙이고 서로 눈치 보면서 묵묵부답이죠. 일이 있어서 먼저 가겠다고 치고 나가면 해방인데 기회만 노리는 거죠. 마지막 남은 사람마저 일이 있다고 하면 다음날 분위기가 싸늘해요. 요새는 외근 기회만 있으면 최대한 늦게 나갔다가 바로 퇴근합니다.”
돌싱 상사를 모시고 있을 때는 무엇보다 말조심이 최우선이다. 일상적으로 하는 대화도 돌싱 상사에게는 예사롭지 않게 들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건축회사에 다니는 C 씨(여·32)도 얼마 전 이혼을 한 과장 때문에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할 때 늘 조심하고 있다. 여자인 데다 싱글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작은 단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눈이 보인다는 것.
“사무실이 크지 않아서 점심은 여직원들끼리 반찬을 싸와서 같이 먹을 때가 많아요. 그럴 때는 아무래도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오가죠. 여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남자친구나 남편이 주제에 오르는 때도 종종 있어요. 예전에는 배우자나 애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거나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죠. 은근슬쩍 자랑하기도 했고요. 이젠 과장님 때문에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기가 조심스럽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유명 연예인 커플의 이혼 소송 때문에 온 세상이 떠들썩했잖아요. 사무실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 얘기 했다가 나중에 깨닫고 실수했다 싶었죠. 좀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W 씨(여·27)도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실장한테 말실수를 해서 미안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유난히 가족 행사가 많은 5월, 회사에서 가족 동반 야유회를 가는데 그 준비로 정신없다 보니 실장이 돌싱이라는 사실을 깜빡한 것이 화근이었다.
“야유회를 갔는데 실장님이 아이들만 데리고 오셨더라고요. 순간적으로 ‘왜 혼자 오셨어요?’라고 해버렸지 뭐예요. 순간 아차 싶었는데 엎질러진 물이죠. 게다가 거의 모든 게임이 부부동반이거나 아이들과 함께하는 방식이었거든요. 실장님은 아이들도 어려서 함께하기 힘든 게임이라 그냥 우두커니 자리에서 아이들 보면서 앉아 계시는데 말실수부터 시작해서 굉장히 죄송했습니다. 솔로들을 위한 게임이 있긴 했지만 그건 또 젊은 미혼남녀 직원들을 위한 거였거든요. 실장님이 즐길 수 있는 게임만 따로 만들 수도 없고….”
조심해야 할 부분이 더 많겠지만 돌싱 상사와 함께 근무하다보면 곤란할 때도 있다. 난처한 부탁 때문에 남모를 고민이 생기기도 한다.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J 씨(여·34)는 요새 함께 일하고 있는 부장 보기가 좀 껄끄럽다고 이야기했다. 부탁 아닌 부탁을 받아서다.
“부장님이 요즘 들어 굉장히 외롭고 쓸쓸하다고 하시면서 주위에 괜찮은 여자 없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농담처럼 받아들여서 없다고 하면 상처 받으실 것 같고, 찾아보겠다고 하면 소개해 줄 때까지 계속 집요하게 물어볼 것 같았죠. 솔직히 주변에는 소개해 줄 여자가 없었거든요. 당시에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면서 얼버무리긴 했는데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 부탁을 계속 하셔서 참 곤란하네요. 주변에 싱글도 있고 돌싱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비슷한 상황이라도 부장님을 만나보라고 하면 십중팔구 기분 나빠할 게 뻔해서요. 참 난처합니다.”
IT회사에 근무하는 M 씨(31)도 돌싱인 여자 상사 때문에 곤란할 때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같은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야근을 할 때도 많고 연락할 일도 많은데 그때마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자친구가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몰래 사내 연애하는 여자친구한테 능력 있고 자기 관리 잘하는 돌싱 여자 상사가 멋있다는 말을 한 적 있는데 그 다음부터는 ‘감시모드’로 변하더라고요. 근데 또 상사도 지나치게 친절하게 굴어서 곤란합니다. 거리를 좀 두려고 하면 따로 불러서 화난 것 있느냐면서 말해보라고 해요. 여자친구 때문에 거리를 두려고 한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외근 나갈 때도 상사가 꼭 저를 지목해서 데리고 나가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최근 돌싱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가장 난처할 때’는 남성의 경우 33.1%가 ‘가족관련 대화가 나올 때’로 답했고, 여성은 51.2%가 ‘가족관련 서류를 제출할 때’로 답했다. 같은 사무실에 돌싱이 있다면 앞서의 사례처럼 애환이 있더라도 조심하는 수밖에. 게다가 상사 아닌가.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