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하지만 낙천적인 소시민 역할로 글로벌 홈런…“뻗친 머리·안면 홍조 그대로, 다 내려놓고 찍어”
해외 팬들에겐 블랙 슈트를 입은 이자성, 사나운 개들의 짖음과 함께 등장한 수양대군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이전 모습이 아닌 성기훈으로 먼저 각인된 것이 좀 아쉽긴 하지만, “그것도 전데 어쩌겠어요”라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에게선 이전보다 더 짙은 여유가 느껴졌다.
“절박한 모습을 너무 사실적으로, 심각하게 그리면 전체 분위기가 다운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위트나 재미있는 요소를 섞어야 됐는데 그게 참 고민이 되더라고요. 여기에 위트를 더 집어넣으면 이 모든 행위들이 가짜처럼 보이진 않을까, 그렇다고 너무 적으면 지루하지 않을까…. 그런 걸 적절히 잘 섞어야만 기훈의 캐릭터가 초반에 게임장 안으로 자연스럽게 훅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죠.”
이정재가 분한 ‘오징어 게임’ 속 성기훈을 관통하는 단어를 꼽자면 절박함, 해맑음, 지질함, 그리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믿음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동차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파업에 동참했다가 구조조정으로 실직하고, 치킨집을 열었다가 실패한 뒤 이혼하고 양육권까지 빼앗긴다. 대리기사로 근근이 먹고 살지만 취미(?)인 경마만큼은 포기할 수 없어 시장 일을 나가는 노모의 체크카드를 몰래 훔친 뒤 그 돈을 경마에 쏟아 붓기도 한다. 거기에 사채까지 정말 ‘가지가지’ 지질한 삶을 살면서도 한없이 낙천적이고 해맑으며 철없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소시민이다.
그런 그가 456억 원이 걸린 서바이벌 데스 게임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면서부터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한다. 누군가 죽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게임에서도 소외된 옆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다 같이 살아 나가는 법을 고민하는 기훈의 내면 심리가 게임을 거듭해 나가며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오징어 게임’을 이루는 이야기의 큰 줄기가 된다. 그런 만큼 이정재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기훈에 대해 미움을 먼저 갖지 않도록 캐릭터 성을 조절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극 중에서 중요한 캐릭터이기도 하고, 미움을 받으면 안 되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철이 없는 그런 면은 좀 귀엽게 보여드리려 했죠(웃음). 너무 밉상인 캐릭터로 나오면 극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거든요. 사실 저는 기훈이가 가진 선한 면이 참 좋더라고요. 극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기본적인 선한 마음 때문에 사람들을 신경 쓰고 도와주는 모습들을 보면서 참 따뜻한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 짠했는지도 몰라요.”
그런 기훈을 연기하기 위해 이정재는 촬영 기간 중에 자신을 완전히 내려놔야 했다. 지난 2020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때도 자신과 헤어 담당 스태프를 골치 아프게 했던 곱슬머리를 제멋대로 길어지게 내버려 뒀다. 염색도 하지 않아 마구잡이로 뻗친 머리카락이 뒷덜미를 수북하게 덮고, 얼굴엔 꼬질꼬질한 땀자국과 때가 그대로 남았다. “멋스러운 걸 걷어내니까 너무 편했다”라는 게 성기훈을 연기한 이정재의 소감이었다.
“사실 제가 그때 알레르기가 심하게 나서 얼굴에 홍조가 군데군데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커버하지 말고 그대로 가자고 얘기했던 게 기억나요. 아마 그걸 보고 톤다운 메이크업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또 제가 원래 곱슬머리인데 염색을 안 하면 되게 지저분하거든요(웃음). 그런데도 그냥 염색도 하지 말고 머리도 막 길러서 더 컨트롤 안 되는 상태로 지저분하게 보이는 걸 최대한 살려서 가자고 했어요. 그런 의견들이 모여서 기훈이가 탄생한 거죠. 해외 팬들이 제 이미지를 기훈이로 먼저 기억하는 거요? 그게 뭐가 오해예요, 그냥 제가 그렇게 생긴 건데 뭐(웃음). 그런데 제가 재미난 걸 봤는데, 어떤 분이 ‘이정재가 그렇게 지질한 연기만 하는 배우가 아닙니다’라는 취지로 글을 쓰시면서 다른 예전 작품들 속 제 사진을 모아서 막 해명을 하시더라고요. 그게 너무 재밌었어요(웃음).”
황동혁 감독과 영화 ‘도가니’의 인연을 시작으로 이번 ‘오징어 게임’에 특별출연한 배우 공유와의 딱지치기 신도 자신을 어느 정도 내려 놔야 가능했다. 선배인 이정재의 뺨을 실제로 때려야 하는 것을 고뇌했다기엔 너무나도 차진 손놀림을 보고 ‘공유, 혹시 이정재 뺨 때리고 싶어서 특출 결정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완벽한 신이 나온 데엔, 이정재의 그런 노력도 분명 큰 몫을 했을 터다.
“실제로 공유 씨가 저를 진짜로 때리는 걸 되게 부담스러워 했어요(웃음). 오히려 살짝 때려서 NG가 나는 바람에 다시 찍어야 되는 상황이 많았죠. 진짜 차지게 때려야 ‘오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실패하면 굉장히 부담스러워 하면서 ‘아… 한 번 더 때리겠습니다’ 이러면서 때리더라고요(웃음). 사실 되게 재미난 장면이라서 연기하는 사람이나 연기를 지켜보시는 스태프 분들이나 다들 재미있게 찍었던 것 같아요.”
그 정도 위치에서도 이처럼 작품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된 이정재는 차기작이자 감독 데뷔작인 영화 ‘헌트’ 촬영에 집중하고 있다. ‘캐릭터 콜렉터’라는 별명에 걸맞게 아직 배우로서도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가 더 많다는 그는 성기훈이 그렇게 다가왔듯, 자신에게 더 많은 기회가 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데뷔 30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도 그 욕심은 여전하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앞으로 더 많은 기회들이 있었으면 해요. 그 기회가 온다면 더 열심히 해서 잘 해보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있어요. 연기자 입장에서는 다양한 일을 많이 해보고 싶은 건 당연한 것이고,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지금까지 있어줘서 또 너무 감사하죠. 이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제가 나온 작품의 DVD를 모으는 게 너무 좋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조금씩 다른 모습의 포스터로 이정재가 나오는 모습들이 재밌더라고요. 앞으로도 기회가 온다면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