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조 원 칼자루’ 안 걸리는 데 없다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들이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에 대한 의결권 행사 등 주주권을 적극 행사해야 한다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은 지난 4월 26일 “대기업의 관료주의를 막고 시장의 공적 기능 강화를 위해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들이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면서 “국민연금은 국내 주요 기업의 1, 2대 주주다. 포스코, KT, KB금융, 하나금융 등의 최대주주다. 삼성전자 지분도 이건희 회장보다 많다”고 밝혔다.
재계가 “정치의 시장 개입”이라며 반발하고 있지만 청와대는 곽 위원장의 말에 적극 제동을 걸지 않는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대중소기업 상생, 이익공유제에 미적거리는 대기업에 대한 압박용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이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의 주식이 얼마나 되기에 이처럼 재계에서 사색이 돼서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
미래기획위원회는 공적 연·기금 중 가장 덩치가 큰 국민연금이 적립금의 17%인 55조 원을 국내 주식에 투자했으며, 139개 국내기업에 대해서는 5%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지난해 9월 30일 기준). 이 가운데 30대 그룹에 속하는 기업의 경우 국민연금이 5% 이상 보유하고 있는 기업의 수는 38개다(지난해 12월 30일 기준).
실제 국민연금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은 상당수 기업에서 그룹 오너 보유지분을 넘어선다. 특히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인 지주사의 주식을 회장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경우 파문이 적지 않을 것이 불을 보듯 빤한 셈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상호출자를 제한한 기업집단(4월 5일 현재, 공사 제외)을 기준으로 한 30대 그룹 가운데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을 계열사로 두고 있는 그룹은 모두 17곳으로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포스코 한진 한화 KT STX LS CJ 하이닉스 대우조선해양 KCC 효성 현대백화점이 이에 해당한다.
각 기업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사업보고서 등(2010년 말 기준)에 따르면 삼성물산의 경우 국민연금이 가진 주식은 1309만 3825주로 지분율로 따지면 전체 주식의 8.14%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가진 주식 수는 220만 6110주로 1.37%에 불과하다. 삼성SDI의 국민연금 지분율은 7.18%. 이 회장 등이 특수관계인과의 주식 보유액을 합쳐 총 14.15%의 지분율로 최대주주에 올라 있지만 단일 주주로 보면 국민연금이 가진 지분이 가장 많다.
삼성그룹의 대표 주자인 삼성전자 주식도 곽 위원장이 말한 대로 국민연금이 이 회장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국민연금이 가진 주식은 지난해 7월 9일 금감원에 신고한 ‘주식 등의 대량보유상황보고서’에 따르면 735만 8213주로 전체 주식의 5.00%다. 반면 이 회장이 가진 주식은 2010년 12월 말 현재 498만 5464주(보통주)로 3.38%에 해당해 이보다 적다. 홍라희 삼성미술관리움 관장(0.74%),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0.57%)의 지분을 합쳐도 국민연금 지분에 미치지 못한다.
국민연금이 다른 삼성그룹 계열사인 삼성엔지니어링과 삼성화재해상보험, 삼성SDI, 호텔신라 등에 대해 가진 지분은 각각 5.71%, 5.01%, 5.86%, 5.80%로 대부분 2대 주주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이 회장은 해당 기업의 주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 회장은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등을 통해 그룹을 간접 지배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가 이 회장과 특수관계인이 60.4%의 지분을 보유한 삼성에버랜드 중심의 순환구조로 돼 있는 까닭에서다.
재계 2위 현대자동차그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 주식을 1139만 5859주(5.17%) 보유한 반면, 국민연금은 이보다 많은 1310만 3446주(5.95%)를 가지고 있다. 정 회장이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한 순환출자로 그룹을 지배하고 있지만 현대자동차만 놓고 보면 국민연금이 더 힘이 센 셈이다. 국민연금은 정 회장이 1068만 1769주(12.52%)를 가진 현대제철의 주식도 그 절반 수준인 516만 898주(6.06%)를 보유하고 있다.
SK그룹의 경우 국민연금은 SK브로드밴드(7.57%), SK네트웍스(6.83%), SK이노베이션(6.59%), SKC(5.10%) 등의 지분을 5% 이상 가졌지만 최 회장은 지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최 회장은 그룹 지주사인 SK㈜의 최대주주인 SK C&C 주식을 44.50% 보유하고 있고 이를 통해 SK그룹을 통제하고 있다.
LG그룹 일부 계열사들도 국민연금이 구본무 회장보다 지분이 많았다. LG상사의 경우 구 회장의 지분은 1.65%인 데 반해 국민연금은 지분이 9.66%나 됐다. 구 회장 지분이 없는 LG디스플레이, LG패션, LG화학 등의 주식도 국민연금은 각각 6.50%, 8.43%, 5.38% 가지고 있다. 구 회장은 지주사인 ㈜LG 지분 10.72%로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한진그룹 계열사의 경우 조양호 회장이 국민연금보다는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의 주식 9.50%, ㈜한진의 주식 6.87%를 보유해 국민연금이 가진 8.45%, 6.33%보다 조금 더 많았다. 다만 한국공항의 경우 조 회장의 지분은 없는 반면 국민연금은 6.47%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이 가진 한국공항 지분(59.54%)을 통해 한국공항을 지배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계열사 전체를 지배하는 그룹 지주사의 주식을 5% 이상 보유한 곳도 있었다. 한화그룹의 경우 지주사인 ㈜한화의 주식을 국민연금이 7.39% 가지고 있다. 김승연 회장의 지분은 22.65%다.
또한 국민연금은 LS그룹 지주사인 LS의 주식을 8.00% 보유해 구자홍 회장 지분(2.96%)보다 많았다. 다만 구 회장은 특수관계인과의 주식을 합쳐 33.4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경영권에는 문제가 없다.
CJ그룹의 경우도 국민연금이 지주사인 CJ의 주식을 6.20% 가져 이재현 회장(41.20%)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주식보유자였다. 두 그룹 산하의 LS산전과 CJ지브이, CJ제일제당 등은 회장의 지분은 없지만 국민연금은 각각 6.45%, 9.07%, 8.48%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사돈 기업’인 효성그룹의 지주사인 효성 역시 국민연금이 조석래 회장(10.32%)의 절반 수준인 5.49%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
KCC그룹 산하 KCC는 정몽진 회장이 17.76%, 국민연금이 5.87%를 가지고 있고, 현대백화점그룹의 현대그린푸드는 정지선 회장이 13.74%, 국민연금이 7.9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STX그룹 계열 STX엔진의 경우 강덕수 회장의 보유지분은 없지만 국민연금은 6.26%의 지분을 갖고 있다.
오너가 없는 그룹의 경우 아예 국민연금이 최대 주주로 신고된 경우도 있다. KT의 경우 국민연금이 8.26%의 지분을 보유해 최대 주주였으며, 하이닉스반도체 역시 국민연금이 8.10%를 소유해 최대 주주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국민연금과 함께 4대 공적 연·기금으로 꼽히는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 측은 모두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없다”고 밝혔다. 공무원연금은 “주식 투자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5% 미만 지분 보유 기업은 밝힐 수 없다”고 보탰다. 군인연금 측은 “규모도 크지 않을뿐더러 직접투자가 아닌 펀드로 운용하고 있다”고, 사학연금은 “자산운용업체에 외주를 준 데다 운용자금이 적어 지분이 별로 없다”고 전했다. 최근 ‘기타법인’이라는 이름의 증시 큰손으로 등장한 우정사업본부는 “보유해봐야 1% 미만이고 외주를 줘 주식 보유 상황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현황을 파악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서찬 언론인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