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 철철’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콜
1930~4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스타 시스템이라는 걸 만들어 여배우에게 특정 이미지를 강조하는 시기를 거친다. 특히 가장 강조된 이미지는 섹스어필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섹스어필 스타들이 탄생했다. 그렇지만 이런 획일화된 스타시스템은 오히려 다양한 재능을 가진 배우들까지 단지 글래머라는 이유만으로 뛰어난 연기력을 감추고 살게 만들었다. 라나 터너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21년 아이다호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줄리아 진 밀드레드 프랜시스 터너’. 부모가 물려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 영국이 뒤섞인 혈통은 그녀에게 묘한 느낌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음악을 들으며 온 가족이 춤을 추었던 터너의 가족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아버지는 광부였는데 카드 게임에 능숙해 내기에서 항상 이겨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할 정도였다. 하지만 ‘타짜의 재능’은 비극의 씨앗이었다. 크게 한 판 이긴 어느 날 밤, 그는 강도에게 살해되었다. 터너가 여덟 살 때 일이었다.
어머니는 고향인 아이다호를 떠나 일자리가 많은 LA로 이사를 갔다. 그녀가 ‘꿈의 공장’인 할리우드에 들어가게 된 건 우연이었다. 15세 되던 해 할리우드의 어느 카페에 콜라를 마시러 갔다가 영화산업 전문지인 <할리우드 리포터>의 발행인 W.R. 윌커슨의 눈에 뜨인 것. 윌커슨은 그녀를 당대 최고 감독 중 한 명이었던 머빈 르로이에게 소개했다.
160㎝의 키에 34-26-38의 다소 통통한 몸매였지만 아이 같은 얼굴에 오묘한 눈빛의 16세 소녀는 빠른 시간 안에 대중에게 어필했다. 데뷔작 <그들은 잊지 않을 것이다>(1937)에서 단역을 맡았는데, 타이트한 파란색 스웨터를 입은 모습에 젊은 남성 관객들은 환호하며 ‘스웨터 걸’이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이후 그녀는 스튜디오의 관리 속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나간다. 콘셉트는 당연히(!) 섹스어필이었다. 가슴이 흔들리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실크 브래지어만 입을 것을 강요받았고 적갈색으로 물들인 머리는 20대가 되면서 백금 빛으로 바뀌었다. 광택이 나는 메이크업을 시작했고, 눈썹을 밀기도 했다. 사실 약간은 싸구려 이미지였다.
이후 터너의 주가는 급상승했다. 워너에서 MGM으로 옮기면서 50달러였던 주급은 100달러로, 그리고 스무 살 땐 1500달러에서 스물네 살 땐 4000달러로 치솟았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1946)의 ‘코라’ 역은 영화사상 가장 유혹적이며 관능적인 캐릭터 중 하나였다. <삼총사>(1948) <미녀와 건달>(1952)이 이어졌고 <페이튼 플레이스>(1957)로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배우로선 상승세였지만 그녀의 사생활은 암초에 부딪혔다. 일곱 명의 남자와 여덟 번 결혼(스티븐 크레인과 이혼 후 재혼)한 기록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보다 먼저였다. 하지만 7명의 남편들은 그녀의 애정 생활에서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다. 폴 뉴먼, 숀 코너리, 리처드 버튼, 렉스 해리슨, 에롤 플린, 미키 루니, 로버트 테일러, 제임스 스튜어트, 클라크 게이블, 존 가필드, 프랭크 시내트라, 타이론 파워, 커크 더글러스, 딘 마틴 등 그녀는 공연한 배우는 기본이고, 이외의 스타들과도 염문을 뿌렸다.
배우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스타덤에 올린 머빈 르로이 감독을 비롯, 베니 굿맨 같은 뮤지션, 수많은 제작자들, 벅시 시겔 같은 갱 보스, 조 루이스 같은 권투선수, 하워드 휴즈 같은 거물 기업인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까지, 줄잡아 70여 명의 남자들과 그녀는 ‘사랑하는 관계’였다. 그리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갱인 쟈니 스톰파나토와 잠시 데이트를 했던 그녀는 헤어지려 했지만 쟈니는 거부했다.
어느 날 터너의 집에서 큰 싸움이 있었고 이때 터너의 딸인 셰릴(당시 15세)이 달려왔다. 셰릴은 엄마를 지키기 위해 식칼을 휘두르다가 쟈니를 찔렀다. 요즘으로 치면 ‘O.J. 심슨 사건’에 버금갔던 일로 유능한 변호사 덕에 정당방위로 인정받았다. 사람들은 라나 터너가 죽였다고 수군댔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다.
치명타를 입은 것처럼 보였지만 터너는 다시 재기했다. <슬픔은 그대 가슴에>(1959)는 직접 제작비를 댄 영화로 큰 흥행을 거두었다. 이후 1960년대에 내리막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지만 1970년대엔 연극에 도전해 수많은 도시를 돌며 무대에 올랐다.
“난 남자들을 좋아했고 남자들은 나를 좋아했다”며 ‘스캔들의 여왕’이 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지만 “난 한 남자와 살며 일곱 명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하지만 일곱 남편을 두고 한 명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며 씁쓸한 농담을 남겼던 라나 터너는 조금은 외로운 여자였다. 할리우드의 모든 감독들이 그녀의 연기력을 인정했지만 ‘스웨터 걸’ 이미지에 갇혀 배우 경력의 대부분을 허비하기도 했던 배우. 그녀는 딸 곁에서 1995년에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