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관계자가 ‘3자 저격설’ 직접 제기
▲ <일요신문>이 1989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과 관련 경호원 오발 의혹 등을 제기했다. 원 안 사진은 1974년 저격범으로 지목된 문세광이 재판을 받는 모습. |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의문을 제기한 매체는 <일요신문>이다. <일요신문>은 지난 1989년 8월 20일,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과 관련한 몇 가지 의혹들을 자세히 보도한 바 있다. 80년대 후반은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꼭꼭 묵혀 두었던 민감한 옛 이야기들을 하나 둘 씩 풀어내던 시기였다. 당시 <일요신문>이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던 난제는 ‘경호원 오발 의혹’과 ‘공범 개입 의혹’이었다.
1974년 8월 당시 문세광은 제일교포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권총으로 무장한 채 손쉽게 한국에 들어왔다. 광복절 기념행사가 있었던 국립극장 현장에 들어설 때도 그는 어떤 제지도 없이 행사장에 들어갔다. 원래 초청 인사들은 비표를 달고 행사장에 입장하게 되었지만 문세광은 비표를 달지 않고도 오전 9시 30분경 귀빈용 입구를 통해 유유히 행사장에 입장했다. 당시 그는 자신을 일본대사관 직원으로 사칭하는 기지를 발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엄하기로 유명한 대통령 행사장에 어떻게 그런 허술한 통제가 이루어졌는지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문세광은 범행 전 조선호텔에 머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일요신문>은 문세광이 조선호텔 투숙 당시 또 다른 제3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건 발생 이틀 전 조선호텔 측은 문세광이 머문 1003호실에 관광 프로그램 확인차 전화를 걸었는데 문세광이 아닌 서울말을 쓰는 한 남성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고 확인해 줬다. 이어 그 남성은 문세광을 바꿔줬지만 당황한 문세광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또 당시 그가 빌린 리무진의 등록번호가 가짜였다는 사실이 조사결과 밝혀지면서 공범 가능성은 더욱 농후했다. 공범 존재에 대한 추측이 강하게 제기되는 상황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수사본부는 공범 부분에 대한 수사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또한 <일요신문>은 당시 범인 문세광과 저격당한 육 여사의 물리적 위치에 대해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문세광은 행사장 중앙 왼편인 B석과 C석 사이의 통로를 뛰어나오며 저격을 시도했는데 실제 그의 탄알에 육 여사가 맞았냐는 것이다. 육 여사의 두개골 관통 부위와 방향만 확인해도 답은 쉽게 나올 수 있는 문제였다. 그 당시 <일요신문>은 육 여사의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에게 이에 대한 답을 구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의사는 답을 거부했다.
또한 사건 수사본부에 참여했던 전 서울시경 감식계장 이건우 경감(작고)은 1989년 생존 당시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문세광이 쏜 총알은 4발이며 육 여사를 맞힌 탄두는 분명히 없다. 문세광의 총은 경호실 총과 같은 리벌버였으며 이상하게도 탄두는 수사 전에 아예 경호실에서 수거해갔다”고 말했다. 수사본부에 참여한 역사적 증인이 당시 수사의 문제점을 직접 제기하며 문세광이 아닌 제3자 피격설을 주장한 것이다.
이 경감은 비슷한 시기, 또 다른 매체인 월간지 <다리>를 통해 “총격사건은 철저히 은폐되었다. 범인은 문세광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기자가 입수한 당시 이 경감의 인터뷰 전문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그는 1989년 인터뷰 당시 “과거 경찰은 권력의 시녀였다. 경찰의 중립화를 위해 난 당시 사건에 대해 진실을 밝히겠다”고 양심선언 취지를 밝혔다. 이 경감의 당시 주장에 따르면 수사본부의 수사과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초동수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예 기본적인 현장보존조차 안됐다. 탄두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사건이 있던 날 밤, 청와대 경호실이 쓸어갔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수사본부에는 김일두 서울지검 검사장을 수사본부장으로 검찰에서는 정치근·김영훈 서울지검 공안검사, 경찰에서는 김구현 치안국 감식계장과 이건우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 등이 참여했었다. 당시 현장검증은 정치근 검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제대로 된 조사과정도 생략된 채 허술하게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감은 이에 대해 “당시 현장검증은 문세광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됐다. 대역자가 문세광을 대신했다. 가벼운 부상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참여시키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현장검증은 원래 범인이 직접 나와 하는 것이 상례지 않나”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인터뷰 당시 이 경감은 육 여사를 저격한 인물은 분명 문세광이 아니었음을 단언했다. 그는 “문세광의 총에는 5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재판기록은 1탄 본인 대퇴부, 2탄 연단, 3탄 불발, 4탄 육 여사 머리, 5탄 국기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는 다르다. 1탄은 대퇴부가 아닌 발 부위였으며 2탄은 연단, 3탄은 불발이 아닌 태극기, 4탄은 육 여사 머리가 아닌 천정, 5탄은 아예 발사조차 되지 않았다. 실제 문세광의 총 안에는 아직 한 발의 탄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난 그 증거로 나중을 위해 현장검증 사진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2005년에는 ‘육영수 피격사건’과 관련한 외교문서가 30년 만에 공개됐다. 하지만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됐던 당시 문서에는 저격범 문세광을 둘러싼 한일 양국 간 외교적 마찰 등이 담겨있을 뿐, 직접적인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외교문서가 공개되었을 즈음, 이 사건은 다시금 언론에 의해 회자되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이 ‘영상분석’ ‘소리분석’ 등 다양한 첨단기술을 이용해 범인의 실체를 밝히려 노력했었다. 몇 차례 시뮬레이션을 통해 제3자 저격설의 단서는 찾아냈지만 명확한 범인의 실체는 밝히지 못했다. 언론들의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이 벌어진 지 37년이 지난 오늘까지 ‘사건의 진범’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