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자진삭감 불구 트레이드돼 A등급, 결국 권리행사 1년 미뤄…최재훈 등 ‘실력은 A 등급은 B’ 덕 본 선수도
이유가 있다. 서건창은 2021시즌을 끝으로 프로 데뷔 후 첫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는 예비 FA였다. 2008년 LG 육성 선수로 입단해 단 한 타석만 서고 방출된 그는 육군 현역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뒤 2011년 테스트를 통해 넥센(현 키움)에 입단하면서 야구인생의 꽃을 피웠다. 2012년 신인왕을 수상했고, 2014년엔 KBO리그 역대 최초로 한 시즌 200안타를 돌파(201개)했다. 그 후 팀에서 주전 자리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육성선수 신화'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 꼽혔다.
숱한 우여곡절을 거친 서건창에게 첫 번째 FA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중요한 기회였다. 하지만 소속팀 키움에 잔류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모기업이 없는 키움은 내부 FA를 대부분 다른 팀으로 보내는 게 관례였고, 팀에 남는 선수는 '대박'과 거리가 먼 조건에 사인해야 했다. 서건창 입장에선 스스로 다른 팀으로 옮기기에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고민하다 선택한 묘수가 '자진 연봉 삭감'이었다. 서건창은 당시 "혼자서 판단한 건 아니고 에이전시와 긴 시간 상의했다. 선수로서 좀 더 나은 앞날을 위해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본격적으로 실효를 본 FA 등급제
파격적인 선택의 배경이 된 건 지난해 말부터 시행된 'FA 등급제'다. 준척급 FA들과 베테랑 FA들의 숙원과도 같았던 이 규정은 FA 제도가 처음 시작된 1999년 이후 21년 만에 맞이한 가장 큰 변화였다. 2019년까지만 해도 선수의 나이나 경력, FA 자격 취득 횟수, 주전 혹은 비주전 여부 등에 관계없이 KBO 규약 'FA 획득에 따른 보상' 조항이 모든 FA에게 일괄적으로 적용됐다. 다른 팀으로 FA를 보낸 원 소속구단은 선수를 데려간 구단으로부터 그 선수의 직전 시즌 연봉 200%에 해당하는 보상금과 상대 구단 20인 보호선수 외 1명의 선수 계약을 양수하거나 연봉의 300%에 해당하는 금전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이제는 다르다. 신규 FA는 기존 FA 계약자들을 제외한 선수들의 최근 3년 평균 연봉과 평균 옵션 금액으로 순위에 따라 등급을 나눈 뒤 아래 등급일수록 완화된 보상 규정을 적용받는다. 처음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은 △구단 내 연봉 3위 이내와 리그 전체 연봉 30위 이내인 A등급 △구단 내 연봉 4~10위와 전체 연봉 31~60위인 B등급 △구단 내 연봉 순위 11위 이하와 전체 연봉 순위 61위 이하인 C등급으로 각각 분류된다.
이 가운데 A등급 선수를 영입하는 구단만 기존 보상안과 마찬가지로 전년도 선수 연봉의 300% 현금 또는 보호선수 20인을 제외한 선수 1명과 연봉 200% 현금을 원 소속팀에 보상해야 한다. 반면 B등급 선수가 이적했을 때는 원 소속구단이 묶을 수 있는 보호선수 수를 25명으로 늘리고 보상 금액도 전년도 연봉의 100%로 완화했다. C등급 선수는 보상선수를 내줄 필요 없이 전년도 연봉의 150%만 보상하면 된다.
서건창은 많은 구단이 보상 조건 때문에 외부 FA 영입을 망설인다는 점을 고려해 스스로 연봉을 깎고 B등급으로 편입될 요건을 갖췄다. 실제로 서건창이 키움에서 계속 뛰었더라면, 올 시즌이 끝난 뒤 큰 문제없이 B등급 FA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7월 27일 LG와 키움이 투수 정찬헌과 서건창을 맞바꾸는 일대일 트레이드를 단행하면서 계산이 어긋나게 됐다. 젊은 선수가 늘어난 LG에서 서건창의 최근 3년 몸값은 비 FA 선수 중 3위에 해당됐다. 서건창은 트레이드로 갑작스럽에 팀을 옮기게 된 것은 물론이고, 올 시즌 연봉만 손해를 본 채 A등급 FA로 분류되는 악재를 맞닥뜨리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FA를 앞둔 올 시즌 성적도 썩 좋지 않았다. 특히 LG 이적 후에는 68경기에서 타율 0.247, 홈런 2개, 24타점을 올리는 데 그쳤다. 키움에서의 성적까지 포함해 올 시즌 전 경기에 출장하는 강철 체력을 과시했지만, 타율은 0.253으로 프로 데뷔 후 가장 낮았고 출루율 역시 0.350에 그쳤다. 심지어 대부분의 팀이 이미 확고한 주전 2루수를 보유하고 있는 터라 시장 상황마저 좋지 못했다. 원 소속팀 LG조차 서건창에 관해서는 "반드시 잡겠다"는 의지를 내비치지 않았다.
결국 서건창은 프로 14년 만에 얻은 첫 FA 권리 행사를 1년 미루기로 결정하고 FA 승인 신청을 하지 않았다. 올 시즌 후 FA 자격을 얻은 19명 중 승인 신청을 포기한 선수는 서건창 외에 장원준(두산 베어스), 나지완(KIA 타이거즈), 오선진(삼성 라이온즈), 민병헌(롯데 자이언츠)이 전부다. 민병헌은 이미 시즌 도중 은퇴를 선언했고, 장원준, 나지완, 오선진의 권리 포기는 예견됐던 일이다. 하지만 뜻밖의 불운에 휘말린 서건창의 FA 미신청은 야구계의 화제가 됐다. 서건창은 구단 관계자와 면담에서 "올해는 FA 계약을 포기하고 1년 뒤 다시 도전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내년 시즌에 더 좋은 성적을 올려 명예회복에 성공할지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A급이지만 B등급이 된 수혜자들
물론 올해는 FA 등급제의 덕을 본 선수가 더 많다. 이번 스토브리그부터 본격적으로 구단 내 연봉 순위와 전체 연봉 순위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해당 등급을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팀 내 연봉 순위가 3위 이상이라 해도 전체 30위 안에 들지 못하면 A가 아닌 B등급으로 내려갈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는 그렇지 않았다. 팀 내 연봉 순위 3위 안에 들지 못했더라도 전체 연봉 30위 안에 포함된 선수는 한시적으로 모두 A등급으로 분류했다. 연초 이사회에서 규약이 변경된 후 곧바로 새 제도가 시행되는 점을 감안해 내부 예비 FA를 보유한 구단들의 과도한 피해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주전 선수 6명이 한꺼번에 FA를 신청한 두산 베어스는 이 예외 조항 덕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6명 중 팀 내 연봉 3위 안에 드는 선수가 유희관 한 명밖에 없어서 자칫 주전 선수를 대거 잃고도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할 위기에 직면했던 상황이다. 이들 중 주전 1루수 오재일과 2루수 최주환이 각각 삼성 라이온즈와 SSG 랜더스로 이적했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팀 내 연봉 순위 3위 밖이었던 둘은 리그 전체 연봉 순위 30위 안에 이름을 올려 A등급을 받았다. 그 덕에 두산은 삼성에서 박계범, SSG에서 강승호를 각각 보상선수로 데려와 내야의 빈자리를 메우고 전력 손실을 최소화했다.
FA 등급제 도입 2년째인 올해는 '반드시 둘 다 충족'으로 규정이 강화돼 처음 FA 자격을 얻은 한화 이글스 포수 최재훈이 수혜를 입었다. 그는 올해 2억 6000만 원을 받아 팀 내 비 FA 선수 연봉 3위 안에 이름을 올렸지만, 리그 전체 연봉 순위는 30위권 밖이라 B등급을 받았다. 올해 연봉 2억 원을 받은 KT 위즈 포수 장성우도 첫 FA 협상을 앞두고 B등급으로 분류됐다. 실력은 A급인데 B등급으로 내려간 대표적 사례들이다.
B등급 FA 선수를 영입하는 구단은 A등급 선수 영입 때보다 보호선수를 5명 더 늘릴 수 있는데, 야구 관계자들은 그 격차가 보이는 것보다 더 크다고 입을 모은다. 한 수도권 구단 관계자는 "구단들이 보호선수를 묶을 때 가장 고민하고 아까워하는 선수는 대부분 20인 안에 들기 어렵고 25인 안에는 반드시 들어갈 만한 선수들이다. 다른 팀이 보상 선수로 뽑아가는 선수도 대부분 그 범위 안에 든다"며 "25명이면 주전 대부분과 핵심 유망주를 모두 보호할 수 있다. 보호선수 20명이 25명으로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FA 선수와 계약하는 구단들의 부담을 한결 덜어준다"고 했다.
심지어 최재훈과 장성우는 수년간 팀 주전 포수로 뛰면서 실력과 경험을 인정 받은 선수들이다. 가뜩이나 좋은 포수가 귀한 리그에서 A급 포수가 B등급을 달고 시장에 나오는 건 선수 입장에서 호재다. 원 소속구단에 잔류하더라도 더 유리한 상황에서 협상할 수 있는 카드를 쥔 셈이다. 반면 한화와 KT는 확실한 주전 포수인 둘을 다른 팀으로 보내기가 더 아까워졌다. 두 팀 다 최재훈과 장성우를 "무조건 잡겠다"는 입장이다.
올 시즌 유일한 투수 FA인 삼성 백정현도 마찬가지다. 처음 FA가 된 그는 올 시즌 연봉 2억 5500만 원을 받아 B등급으로 분류됐다. 백정현을 데려가는 구단은 보호선수 25인 외 선수 1명과 2억 5500만 원을 삼성에 보상하면 된다는 의미다.
백정현은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몸값 산정이 가장 어려운 FA 중 한 명이다. 올해 27경기에 선발 등판해 14승 5패, 평균자책점 2.63으로 데뷔 후 최고 성적을 냈다. 리그 평균자책점 2위와 다승·승률(0.737) 공동 4위. 올 시즌에 한정하면 특급 계약도 충분히 가능할 만한 성적이다. 하지만 2007년 데뷔 후 규정이닝을 채운 건 지난 2년뿐이고, 두 자릿수 승리도 올해 처음 올렸다. 지속성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예비 FA의 '반짝 활약'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나올 만도 하다. 나이도 이미 30대 중반이라 섣불리 큰 금액을 보장하기도 어렵다. 원 소속구단 삼성 역시 올 시즌 백정현의 활약상을 인정하고 잔류를 원하면서도 계약기간과 규모를 산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FA B등급으로 분류된 건 백정현에게 한 줄기 희망이다. 삼성이 성에 안 차는 계약 조건을 제시할 경우,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있는 문턱이 A등급보다는 낮아졌기 때문이다. 그가 향후 1~2년만 더 올해에 버금가는 활약을 해준다면, 당장 내년 성적을 위해 국내 선발 투수가 절실한 팀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투자가 될 수 있다. 그동안 수많은 베테랑 선수가 FA 등급제 도입을 절실히 원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병호와 강민호는 C등급
FA 등급제는 기본적으로 선수들의 최근 3년 평균 수입을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자동으로 A등급을 피할 수 있는 예외 조항도 있다. 35세 이상 선수가 처음으로 FA 자격을 얻었을 때는 연봉 순위와 관계없이 C등급을 적용해 선수 보상 없이 이적할 수 있도록 했다. 또 FA 자격을 두 번째로 얻은 선수는 B등급과 동일하게 보상하고, 세 번째 이상 FA 자격을 따낸 선수는 C등급과 같은 보상 규정을 적용하기로 했다.
1986년생인 키움 박병호가 바로 이중 첫 번째 조항에 해당한다. 박병호는 2005년 프로 데뷔 후 주로 2군에서 뛰다 스물여섯이던 2012년에야 본격적으로 풀타임 주전이 됐다. 2016년과 2017년에는 미국으로 진출해 2년간 해외 리그 생활도 했다. 이 때문에 35세인 올 시즌이 끝난 뒤에야 뒤늦게 첫 FA 자격 요건을 채우게 됐다.
C등급인 박병호는 보상선수 부담 없이 이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이름값도 높다. 통산 홈런 327개를 쳐 현역 선수 4위에 올라 있고, 다섯 차례 홈런왕에 오른 키움의 간판타자다. 하지만 C등급의 이점을 누릴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일단 박병호는 올해 연봉 15억 원을 받았다. 그를 영입하는 구단은 키움에 15억 원의 150%인 22억 5000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보상선수 출혈 부담이 없더라도, 박병호 영입 금액 외에 추가로 지출해야 하는 금액의 규모다 너무 크다. 최근 2년간 급격한 하락세도 탔다. 지난해 타율 0.223, 홈런 21개, 66타점으로 부진하면서 2010년 이후 처음으로 5할대 장타율(0.450)이 무너졌다. 올해 성적은 더 좋지 않았다. 118경기에서 타율 0.227, 홈런 20개, 76타점을 기록했고, 장타율(0.430)과 출루율(0.323) 모두 좋지 않았다. 역대 2번째로 8년 연속 20홈런 고지를 밟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키움 입장에선 오랜 기간 팀의 간판으로 활약한 박병호와 FA 협상에서 적절한 합의점을 찾는 게 올겨울 가장 무거운 숙제 중 하나다.
두 번째 FA 자격을 얻는 LG 외야수 김현수, 롯데 자이언츠 외야수 손아섭과 벌써 세 번째 FA가 된 삼성 포수 강민호는 FA 등급제의 숨은 수혜자다. 김현수와 손아섭은 B등급, 강민호는 C등급으로 각각 분류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 세 명 모두 원 소속팀 잔류가 유력하지만, 보상 규모가 좋은 협상 카드로 쓰일 수 있어서다.
특히 강민호는 2013년 11월 롯데와 4년 75억 원에 첫 FA 계약을 했고, 2017년 11월에는 삼성과 4년 80억 원에 계약했다. 그리고 올해 여전히 KBO리그 최정상급 포수로 인정받으면서 세 번째 FA 자격을 얻었다. 강민호 영입에 관심을 보이는 구단은 선수 유출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