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빈은 가을 영웅 증명, 새 팀 안착 오재일‧최주환도 ‘성공적’…유희관 김재호 최형우는 ‘아쉬움’ 가득
그런 정수빈이 2020시즌을 끝으로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자 두산은 거액을 들여 붙잡았다. 계약기간 6년을 보장하고 최대 56억 원을 안겨 타 구단과의 '머니 게임'에서 승리했다. 강팀의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수빈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축 선수 여러 명을 FA 시장에 내보낸 두산이 정수빈에게 예상을 뛰어넘는 베팅을 한 건 지난 스토브리그 최고의 화제 중 하나였다.
#오버 페이 논란 날린 FA 정수빈의 가을 활약
'오버 페이' 논란도 불거졌다. 2009년 데뷔한 정수빈이 풀타임을 뛰면서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한 건 단 한 시즌(2014년)뿐이다. FA 계약에서 거액을 받는 야수는 대부분 수비보다 타격 능력이 뛰어난 중장거리형 타자들이다. 정수빈은 그 반대의 경우에 가깝다. 하지만 정수빈과 오랜 시간 함께한 두산은 기록의 이면을 보고 선수의 가치를 판단했다.
두산 관계자는 "정수빈은 뼈가 부러지지 않는 한, (경기에) 나가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뛰겠다고 나서는 스타일이다. 조금만 컨디션이 안 좋아도 몸을 사리는 일부 스타 선수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몸을 아끼지 않는 투지와 과감한 베이스 러닝, 중요한 경기에서 보여주는 집중력과 '클러치 플레이'가 정수빈의 트레이드마크다. 두산은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정수빈의 영향력을 고려해 6년 계약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정수빈은 장기 계약의 첫 해인 올 시즌 중반까지 극심한 타격 부진에 시달렸다. 8월까지 타율이 1할대에 머물렀고, 출루를 못하니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기도 어려웠다. 한동안 잠잠했던 '오버페이' 논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결국 후반기 초반에는 2군 신세를 지기도 했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당시 "정수빈은 주전으로 뛰어야 할 선수다. 1군에 머물며 대타나 대주자로 나가는 것보다 2군에서 경기를 계속 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며 "심리적인 문제도 있을 테니 재정비도 하길 바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정수빈은 확실히 이전보다 나아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9월 이후 타율이 3할에 육박(0.297)했고, 장타와 타점도 모두 늘었다. 수비와 주루플레이도 함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정수빈의 정규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259, 홈런 3개, 38타점, 50득점, 12도루에 그쳤다. 9월 이후 성적만으로 8월까지의 부진을 만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두산 역시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5강 경쟁을 펼친 끝에 정규시즌을 아슬아슬한 4위로 마쳤다.
그러나 진짜 '정수빈 타임'은 정규시즌이 종료와 동시에 시작됐다. 정수빈은 올해도 가을이 오자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키움 히어로즈와 와일드카드 결정 2차전에서 6타수 3안타 맹타를 휘두르면서 팀을 준플레이오프(준PO)로 끌어올렸다. LG 트윈스와 준PO 1차전에선 결승타를 포함해 4타수 2안타 1타점 1도루로 활약했다. 타석에선 끈질긴 커트와 정확한 콘택트 능력으로 상대 투수를 흔들었고, 출루 후에는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도루를 시도해 상대 포수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준PO 최종전인 3차전에서도 정수빈의 진가는 고스란히 드러났다. 공·수·주에서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치면서 5타수 3안타 4타점 1볼넷 2득점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정수빈의 상징인 '슈퍼 캐치'가 빛을 발했다. 1회엔 LG 선두 타자 홍창기의 짧은 안타성 타구가 날아오자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와 잡아냈고, 2회엔 구본혁의 우중간 안타성 타구를 다시 다이빙 캐치했다. LG 공격의 흐름을 일거에 차단하는 천금 같은 호수비 퍼레이드였다. 9회 마지막 공격에서 투수 앞 땅볼로 아웃됐는데도,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정수빈에게 두산 팬들이 기립박수를 보냈을 정도다.
준PO 3경기에서 타율 0.462(13타수 6안타) 1볼넷 1타점 2득점을 기록한 정수빈은 결국 시리즈 MVP까지 차지했다. "몸값이 아깝다"던 정규시즌의 비난이 "이래서 두산이 잡아야 했다"는 재평가로 전환된 순간이었다.
정수빈은 계속된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도 활약을 이어갔다. 특히 KT 위즈와 맞붙은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1-1로 맞선 5회 1사 2루에서 조용호의 적시타성 타구를 다이빙 캐치해 온 몸으로 실점을 막았다. 3차전에서도 0-0이던 2회 2사 2루에서 레이저 같은 홈 송구로 KT 주자 유한준을 홈에서 아웃시키는 보살을 기록하기도 했다. 비록 두산이 4경기를 내리 패하면서 4전 전패로 준우승했지만, '6년 56억 FA' 정수빈은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자신의 진짜 가치를 후회 없이 보여줬다.
#두산 출신 이적생, 오재일·최주환의 연착륙
올해는 정수빈 외에도 유독 FA 선수들의 활약 여부에 시선이 쏠린 시즌이었다. 2020시즌이 끝난 뒤 FA 자격을 얻은 25명의 선수 가운데 FA를 신청해 승인을 받은 선수는 총 16명. 그중 두산에선 정수빈 외에도 투수 유희관 이용찬, 내야수 김재호 오재일 최주환 허경민 등 7명이 대거 FA를 선언했다. 내야는 사실상 주전 전원이 시장에 나온 셈이라 누가 남고, 누가 떠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국 이적을 택한 건 1루수 오재일과 2루수 최주환이었다. 오재일은 삼성 라이온즈와 4년 최대 50억 원에 계약했다. 삼성은 이승엽 은퇴 후 약점으로 꼽혔던 '1루수 공격력'을 채우기 위해 클러치 히터에 1루 수비도 능한 오재일을 재빨리 낚아챘다. 그리고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삼성의 지난해 1루수 OPS(출루율+장타율)는 0.713으로 10개 구단 1루수 평균(0.801)보다 0.088이나 낮았다. 오재일이 삼성 주전 1루수로 나선 올해 삼성의 1루수 OPS는 0.838. 리그 평균(0.765)보다 0.073 높아졌다. 오재일 홀로 기록한 OPS는 0.878로 팀 평균보다 더 높다. 2020년의 약점이 2021년의 강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오재일은 올 시즌 120경기에서 홈런 25개를 치고 97타점을 올려 삼성의 중심 타선에 무게감을 더했다. 삼성이 2015년 이후 6년 만에 포스트시즌 무대에 복귀한 비결 중 하나다. 시즌 초반 옆구리 부상으로 이탈해 전력 공백이 생기기도 했지만, 삼성이 상위권에서 치열한 순위 경쟁을 펼치던 9월에만 홈런 10개를 쳐 아쉬움을 만회했다. 9월 월간 장타율이 0.738에 달했고, 한 달 사이 28타점을 쓸어담았을 정도다. 삼성은 결국 1위 결정전까지 치른 끝에 KT에 정규시즌 우승을 내줬지만, 오재일의 9월 활약 덕에 3위 LG의 추격을 뿌리치고 2위 자리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최주환도 새 소속팀 SSG 랜더스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그는 SSG가 SK 와이번스를 인수하기 직전인 지난해 12월, 4년 최대 42억 원에 사인하면서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SK가 9년 만에 영입한 외부 FA였다. 최주환 역시 시즌 도중 햄스트링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144경기 중 116경기만 출전했다. 하지만 홈런 18개를 치고 67타점을 올리면서 SSG 타선의 공격력에 힘을 보탰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 눈에 띄게 하락세를 탄 FA도 있다. 두산 유희관과 김재호, KIA 타이거즈 최형우 등이 그렇다. 지난해 말 FA가 된 유희관은 해를 넘긴 올해 2월 두산과 1년 총액 10억 원에 잔류 계약했다. 보장금액(3억 원)보다 인센티브(7억 원)가 더 많은, 불리한 조건이었다.
절치부심해 새 시즌을 시작했지만, 결국 자신의 경쟁력을 증명하지 못했다. 구속이 느린 대신 정교한 제구력으로 승부해 온 투수인데, 올해 제구력마저 흔들리면서 힘을 쓰지 못했다. 15경기에서 4승 7패, 평균자책점 7.71의 부진한 성적을 냈고, 두산의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도 제외됐다. 두산과 3년 총액 25억 원에 두 번째 FA 계약해 '원 클럽맨'을 예약한 내야수 김재호도 89경기에서 타율 0.209를 기록하면서 급격한 부진을 겪었다. 주전 유격수 자리를 박계범에게 물려줬고,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해 고개를 숙였다.
최형우는 2017년 KIA와 4년 총액 100억 원에 계약한 뒤 4년간 홈런 96개, 424타점을 올렸다. KIA가 치른 576경기 중 561경기에 나섰고, 매년 타율 3할을 넘긴 '모범 FA'였다.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3년 총액 47억 원에 두 번째 FA 계약을 성사시킨 비결이다.
하지만 재계약 첫 해인 올해는 '에이징 커브' 조짐이 뚜렷했다. 몸이 워낙 튼튼해 '금강불괴'로 불리는 최형우는 올 시즌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104경기에 출전해 타율 0.233, 홈런 12개, 55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최형우가 1군 주전 선수로 자리잡은 2008년 이래 가장 적은 경기에 나선 시즌이다.
반면 올해 한국 나이로 40세였던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는 114경기에서 타율 0.286, 홈런 19개, 81타점을 기록하면서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냈다. 이대호는 올 시즌을 앞두고 2년 26억 원에 롯데와 FA 계약을 하면서 "(계약 마지막 해인) 2022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과거 한국 최고 타자로 군림했던 그가 현역 생활 마지막 시즌을 어떤 성적으로 마칠지 관심이 쏠린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