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빨리 출근하고 더 많이 뛰며 14년 프로생활 마감…FA 이후 벤치 생활도 귀중한 시간”
LG 팬들한테 ‘또치’로 오랜 사랑을 받은 김용의가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2020시즌 생애 첫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고 LG와 1년 계약(계약금 1억 원+연봉 1억 원)을 맺었던 김용의는 LG의 2021시즌이 준플레이오프에서 마무리되자 바로 은퇴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2008년 2차 4라운드 29순위로 두산 베어스의 지명을 받은 김용의는 그 해 6월 두산과 LG의 2 대 2 트레이드가 단행되면서 두산에서 LG로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의장대 출신으로 현역 복무를 마친 그는 주전으로 뛰며 존재감을 드러낸 적도 있지만 2017시즌 이후에는 주로 경기 중후반 대수비나 대주자로 활약했다. 유격수를 제외한 야수 전 포지션을 소화하며 투지와 근성의 대명사로 인정받았던 김용의와의 인터뷰를 정리한다.
“안녕하세요. 지금은 일반인 김용의입니다.”
인터뷰에 앞서 자신을 소개해 달라는 기자의 부탁에 김용의는 소속팀 없이 ‘일반인 김용의’라고 자신을 설명했다. 14년 동안 “LG 트윈스 김용의입니다”로 자신을 소개했을 그가 지금은 소속팀 없는 일반인 신분이 됐다.
모든 운동 선수가 은퇴를 앞둔 순간에는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성적이 좋았든 좋지 않았든 자신의 청춘을 바친 무대에서의 퇴장은 여러 생각을 갖게 만든다. 김용의도 마찬가지였을 터.
“은퇴한 선배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막상 은퇴하고 나면 괜히 공허해지고 불안해진다고 하더라. 지금에서야 선배들의 그 말을 깊이 공감 중이다. 난 해볼 만큼 다 해봤다며 애써 홀가분해지려고 노력했는데 실제 은퇴하고 나니까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다.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뭘 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인지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
원래 김용의는 올 시즌을 마치고 은퇴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정규시즌 3위에 오른 LG가 준프레이오프에서 두산을 상대로 패하고 일찍 시즌을 마무리 짓게 되자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고 한다.
“만약 우리가 두산을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면 1년 더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산한테 지면서 ‘아, 이건 힘들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팀에 남아 있으면 나란 존재가 짐이 될 것만 같았다. 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그만 하는 게 맞았다. 내 자신한테 묻기도 했다. ‘용의야, 지금 은퇴하는 게 맞지?’라고. 내 대답은 ‘응, 맞아’였다. 그래서 은퇴를 결정할 수 있었다.”
김용의는 자신이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음에도 14년을 프로에서 뛴 데 대해 “잘 버틴 덕분”이라고 자세를 낮췄다.
해마다 가을이 되고 시즌이 종료되면 팀마다 웨이버 공시 명단을 발표한다. 김용의는 4, 5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이름이 그 안에 포함되는 게 아닐지 노심초사했다고 토로한다.
“2015년에는 2군에 오래 머물렀다. 시즌 마친 후 방출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이도 젊은데 다른 팀에서 오퍼가 안 오면 어떻게 할지 고민이 컸다. 일부러 모교를 찾아다니며 재능기부도 하고 은사님들께 안부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그러다 2016시즌에 말 그대로 포텐이 터졌다. 한 시즌 반짝하면서 앞으로 걱정 안하고 살 줄 알았는데 가면 갈수록 더 힘들어지더라.”
김용의는 지난 시즌을 마치고 LG와 FA 계약을 맺게 된 뒷얘기를 소개했다. 자신은 잡초 인생이라 단 한 번도 FA를 떠올린 적이 없었는데 계산하지 않고 시즌을 치르다보니 어느 순간 FA 자격을 갖춘 선수가 돼 있었다는 것.
“FA는 야구 잘하는 선수만 누리는 권리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 상황에 처했다. 당시 FA 100억 원대 아니면 계약 안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차명석 단장님이 계약금 1억 포함 2억 원대의 FA 계약을 제안해주셔서 바로 사인했다. 남은 98억 원은 옵션이라고 퉁쳤다.”
FA를 앞둔 김용의는 통산 성적으로 100경기 이상 출전한 시즌은 6번뿐이었고, 주전으로 뛴 시즌은 2년밖에 없었다. 차 단장은 김용의의 성실함과 모범적인 모습에 상징적인 계약을 안기며 김용의가 1년 더 LG와 동행하길 바랐다.
“엄밀히 따져 FA 계약금 제외하면 연봉이 더 줄어든 셈이다.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사인했다. 생애 첫 FA 계약이었으니까. 아주 잠깐 다른 팀에서 오퍼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지만 FA 공시 후 전화 한 통 없는 걸 보고선 LG에 감사한 마음으로 단장님과 웃으며 악수를 나눌 수 있었다.”
류중일 감독이 LG 사령탑으로 부임 후 김용의의 포지션은 대주자와 대수비였다. 1루를 맡고 있던 선수가 부상을 당해도 감독은 김용의 대신 2군에서 선수를 불러 올렸다. 김용의는 처음에 그런 상황들이 속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벤치에서 야구를 보는 시간들이 늘어나면서 야구 경기의 흐름과 양 팀의 작전들, 수비수들의 움직임, 투수의 볼 카운트 싸움 등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선수들의 습관, 스타일까지 파악됐다. 타석에 자주 나서지 못하는 아쉬움을 야구 공부와 연구로 해소했다.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선수 생활은 은퇴했지만 지도자 김용의로 다시 그를 볼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현장’을 꼽았다. 그 ‘현장’이 어떤 형태로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그가 발 딛고 싶은 곳은 여전히 그라운드였다.
“나는 생계형 야구 선수였다. 생존을 위해선 더 빨리 출근하고, 더 많이 훈련하고, 더 많이 치고 달리고, 가장 늦게 퇴근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14년의 프로 생활을 이어온 내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야구를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어도 야구를 누구보다 사랑한 선수라는 걸 팬들이 기억해주길 바란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