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받던 ‘애마부인’ 시대만 잘 탔더라면…
3년 전 <사랑과 전쟁>에 잠깐 얼굴을 내비쳤던 소비아는 단순히 ‘에로 배우’라는 카테고리로 묶어 버리기엔 꽤 넓은 스펙트럼을 지녔던 배우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에로’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는 건 한국 에로 영화의 전설 <애마부인> 시리즈의 ‘5대 애마’라는 타이틀 때문이다.
1968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소비아(본명 주진옥)는 5녀 중 장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시절 럭비 선수였는데 소비아의 큰 키(170센티미터)는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단란했던 가족은 소비아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큰 고통을 겪는다. 이때부터 소비아는 네 명의 동생을 이끌며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밖에서 돈을 버는 동안 집안 살림을 맡아야 했다.
반에서 항상 1~2등을 다투던 우등생이었지만 소비아는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포기했다. 이때 미스코리아 대회가 열렸다. 대회에 나간 소비아는 ‘경기 진’에 당선되었고 큰 키에 시원한 외모로 각종 제품의 CF에 출연하면서 연기자가 될 날을 꿈꾸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어느 에이전시의 소개로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1988)에 출연하게 된 것. 연산군(유인촌 분)의 후궁 중 한 명으로 3일 동안 촬영했던 단역이었는데, 첫 영화에서 베드 신이 있었으니 쉽지 않은 데뷔 경험이었다.
하지만 배우 생활은 쉽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170센티미터의 여배우는 캐스팅되기 쉽지 않았던 것. 강우석 감독의 데뷔작 <달콤한 신부들>(1989), 당대의 이슈작 <서울 무지개>(1989) 등에 단역으로 출연하던 그녀에게 이 시기 대표작은 코믹 액션인 <팔도 쌍나팔>(1988). ‘주희아’라는 예명으로 출연했던 영화였다.
1991년은 소비아에게 기념비적인 해였다. 강구연 감독의 멜로 <무릎 위의 여자>와 <달빛 타는 여자>에 연이어 캐스팅되면서 충무로에 존재감을 알릴 수 있었던 것. 그 결과 <애마부인 5>(1991)에서 당당히 ‘애마’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소비아’라는 이름도 이때부터 사용했다. <애마부인 6>(1992)은 ‘4대 주리혜’ ‘5대 소비아’ 그리고 ‘6대 다희아’가 함께 출연했던 작품. 그리고 <산딸기 5>(1992)가 이어지면서 소비아는 ‘에로 배우’로 각인됨과 동시에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MC를 맡았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후 소비아는 에로티시즘 영화 외에도 멜로드라마, 액션 그리고 <가위 여자>(1993) 같은 호러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돌파구가 될 만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고 에로 쪽으로도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녀가 데뷔했던 1980년대 말은 한국의 극장용 에로 영화가 질적으로 서서히 하향곡선을 그리던 시절. 사실 <애마부인> 시리즈도 예전의 영광과 비교하면 대중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충무로는 1990년대 초부터 급격한 체질 개선에 들어가 로맨틱 코미디 같은 트렌드 영화를 내놓았고, 에로 영화는 비디오용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소비아는 이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 있었다. <애마부인 5> 이후 그녀의 출연작들은 1990년대까지 연장된 1980년대 식 한국영화들이었던 것.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휘청거린다. 비디오 영화도 몇 편 출연하긴 했지만 진도희의 등장으로 글래머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녀의 입지 확보는 쉽지 않았다. 극장용 영화로는 이대근과 공연한 <에로스 2>(1996)가 마지막이었다. 이때 IMF가 터졌고 그녀는 더 이상 일할 곳이 없는 충무로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서른 살의 ‘전직 배우’가 찾은 곳은 일본의 나고야였다. 주경야독으로 쥬코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비즈니스 이노베이션 과정에서 박사 과정을 거친 그녀는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아련한 열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고, (제작되진 못했지만) <형사>라는 영화를 기획 중이던 구명철 감독의 러브콜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2008년 <사랑과 전쟁>의 ‘시한부 아내’ 편에 출연하게 된 것. 12년 만의 연기 컴백이었다.
그녀에게 ‘애마부인’이라는 타이틀은 행운이자 족쇄였다.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은 ‘에로 배우’ 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에로 배우’로도 그녀는 시기를 잘못 탔다는 사실. 에로 이미지로 등장하기엔 쉽지 않은 시절이었고 어떻게 보면 소비아는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에로 여배우의 계보에서 마지막 빅 스타였던 셈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