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판잣집에 살았는데 인생 말년에 이렇게 따뜻한 집에 살고 있어요. 근처의 중학교에서 급식하고 남은 걸 누룽지로 만들어 가져다 줘요. 그걸 끓여 먹어요. 반찬은 성당에서 나물 세 가지를 만들어서 가져다 냉장고에 넣어줘요. 주민센터 담당 직원이 수시로 나를 들여다 봐 주고 한 달에 두 번씩 목욕 봉사하는 사람을 보내줘요. 정말 우리나라 복지는 소리 없이 잘돼 있는 것 같아요. 매달 연금으로 나오는 걸 난 다 쓰지 못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 노인은 누워있는 요의 바닥에 두고 있던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게 건네줬다. 저녁을 사주고 싶지만 몸이 움직일 수 없으니 산동네를 내려가다가 밥이라도 사먹으라는 돈이었다. 그 노인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덜하고 더러운 꼬라지 안보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그 대통령이 겉으로는 욕을 먹지만 복지정책은 잘한 것 같아요. 진심으로 국민을 생각했던 사람 같아요.”
가장 바닥에 있는 그 노인이 오래전 죽은 대통령을 칭찬했다. 그건 진정성 있는 귀한 평가였다. 그렇게 말했던 노인이 그 임대아파트에서 죽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얼마 전 한 노인이 변호사인 나를 찾아왔다. 월남전에 가서 병사로 싸웠던 그는 고엽제의 피해자였다. 국가 유공자로 판정이 된 그는 국가에서 지원하는 약간의 돈으로 노후의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20년 가까이 지원하던 돈을 갑자기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내게 보여준 서류에는 그 이유가 적혀 있었다. 그 노인이 40년 전 저지른 경미한 절도 전과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그 노인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병을 얻어서 돌아왔다. 정신적 트라우마도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원인 모르는 고통을 술로 견디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됐다. 그리고 노숙자가 됐다. 그는 구걸을 해서 술을 사서 마셨다. 돈이 없을 때 좀도둑질을 했다. 힘없는 그는 몇 푼 안 되는 술값 정도 절도죄로 5년 넘게 징역을 살았다.
그는 천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감방 안에서 한 조직폭력배 출신의 인물을 보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그 폭력배 출신은 장애인을 부축해 주고 그런 사람들의 오물 묻은 속옷을 빨아줬다. 그 조폭 출신은 밤이 되면 자신의 사물함에서 책을 내려 조용히 읽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도 따라서 그 책을 읽고 감옥 안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을 도왔다.
출소 후 그는 한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노숙자 합숙소로 들어갔다. 그는 낮에는 공사판의 인부로 나가 일을 하고 합숙소의 허드렛일들을 열심히 도왔다. 그에게 감동을 받은 종교단체는 그를 신학교 보내 목사가 되게 했다. 노숙자생활과 감옥살이를 했던 그는 자기 같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일을 했다.
그런 어느 날 그를 진찰했던 병원의 의사가 고엽제 환자 지원신청을 하게 했다. 그가 아팠던 이유가 비로소 밝혀졌다. 국가 유공자 판정이 내리고 매달 생활비가 지원됐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새 그는 76세의 노인이 됐다. 아내와 함께 보훈처에서 주는 지원금으로 가난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40년 전 좀도둑질 전과 때문에 지원금을 끊었다는 통보가 온 것이다. 법은 전과가 있더라도 참회하면 온정을 베풀게 되어 있었다. 보훈처에서는 노인의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주위에 알아보면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사실에도 고개를 돌렸다. 그냥 40년 전 전과기록 하나만 보고 뉘우침이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뉘우침이 없다고 판단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변호사를 하다 보면 이런 위선적 복지들을 목격한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천사의 말을 한다. 관청마다 비단같이 매끄러운 말이 담긴 플래카드나 선전 구호가 달려있다. 태어나도 그냥 돈을 받는 세상이 됐다. 월남전에 피와 목숨을 팔기 위해 끌려갔던 그는 구걸하는 게 아니었다. 진심과 성실이 담기지 않은 복지는 울리는 꽹과리고 겉포장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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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