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와 입 맞추면 정계가 등 돌리고…
▲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최근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등 큰 목소리를 내면서 정재계 안팎에선 이런 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 15일 한나라당 대표실에서 가진 경제 5단체장 간담회에 참석한 허 회장.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그동안 ‘은둔의 경영자’ ‘영국 신사’ 등 조용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었다. 지난 2005년 구씨 일가와 허씨 일가의 동업체제였던 LG그룹에서 허씨 일가 지분을 끌어내 GS그룹으로 독립할 당시에도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허창수 회장이 유별나게 언론에 오르내린 경우는 지난 2008년 대우조선해양 인수전 때 정도다. 포스코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강력한 인수 후보로 떠올랐다가 막판에 입찰을 포기하면서 포스코마저 덩달아 입찰 자격이 박탈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 당시 허창수 회장은 리더십에 생채기를 내며 적잖은 질타까지 받은 바 있다.
지난 2월까지도 허 회장이 전경련 회장에 오를 것으로 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물론 차기 회장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는 했다. 하지만 GS그룹의 지주회사인 GS홀딩스가 2008년에야 전경련에 가입했다는 점, 전경련과 구본무 LG그룹 회장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 워낙 대외 활동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 당시 전경련이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만 공들이고 있었다는 점 등등. 허 회장이 회장직을 맡을 이유보다 맡지 않을 이유가 휠씬 더 많았다.
그런 허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받아들이자 재계는 의아해 하면서도 기뻐했다. 전임 조석래 회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한 후 무려 7개월간 공석이었던 터다. 게다가 1999년 김우중 대우 회장 이후 11년 만에 10대 그룹 오너가 회장 자리를 맡음으로써 전경련의 위상도 높아졌다. 4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전임 두 회장(강신호 조석래)은 재계를 대표한다고 하기 힘들었지만 허창수 회장은 다르다”면서 “솔직히 대외적으로 볼 때 전임들보다 나은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전경련 회장 취임 초기 허창수 회장은 평소대로 역시 조용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정부의 ‘대기업 압박’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허 회장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즈음 이야기 하나. 지난 3월 10일 전경련회장단회의 때다. 이날 허창수 회장이 전경련 수장에 오른 후 열린 첫 회장단회의였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집중됐다.
이건희 회장이 회의장에 들어서기 직전, 당시 이슈였던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던 것. 이 한마디로 이날의 주인공은 이건희 회장이 돼버렸다. 또 정치권의 압박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허창수 회장과 달리 이건희 회장은 직격탄을 날림으로써 ‘재계 대표는 역시 이건희 회장’이라는 평가도 불러 일으켰다. 이날 정황을 잘 아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허창수 회장이 매우 섭섭해 했던 것으로 안다”며 “허 회장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았던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 5월까지 허창수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서 보인 반응은 “‘기업이 잘 되게 하는 기본원칙을 지켜 나가겠다’는 대통령의 말씀을 전해 듣고 회장단은 감사와 지지를 표명하고, 주요 현안인 물가안정과 투자확대를 통해 서민생활 안정과 일자리 창출에 최선을 다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것이었다. 대기업을 압박하는 정부에 오히려 협조하겠다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전경련이 정녕 재계를 대표하고 있는지 의문’, ‘정부 눈치만 보고 있다’는 재계의 비판을 받았다. 허 회장 취임 초기 회장단회의에 참석했던 4대 그룹 회장들도 회장단회의에 불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허창수 회장이 최근 서슴없이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등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허 회장은 지난 6월 21일 전경련 기자간담회에서 “면밀한 검토 없이 즉흥적으로 나온 반값 등록금 같은 정책들은 당장 듣기는 좋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곤란하다”, “선거를 앞두고 쏟아지는 포퓰리즘성 정책에 대해 재계 의견을 제대로 내겠다”는 등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권의 법인세 감세 철회 움직임과 관련해서도 “기업이 재원이 많으면 고용창출과 투자를 많이 하게 되고 그것이 세계적 추세”라고 말했다. 정유사를 주력 계열사로 둔 오너답게 허 회장은 기름값 인하 연장 조치에 대해서도 “이 정도 했으면 충분히 고통을 분담한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불과 한 달 전 언행을 떠올린다면, 또 평소 허창수 회장의 스타일을 감안한다면 매우 강도 높은 것이었다.
허창수 회장의 급변한 모습은 즉각 정치권과 재계 사이에 갈등의 불을 댕겼다. 안 그래도 여당이 직접 재벌 개혁에 나서고 있는 터에 허 회장의 발언은 정치권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문제, 법인세 감세 철회 등 각종 규제법안 마련, 경제단체장 등의 국회 소환 등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전 방위적으로 대기업을 압박하고 나섰다. 지난 12일 이현동 국세청장 주재로 열린 전국 조사국장 회의도 ‘대기업 압박용’이라는 해석을 낳았다.
이에 대해 재계는 대체적으로 허 회장을 지지하는 모양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재계 대표로서 할 말은 하고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허 회장이 설마 반발을 예상치 못했겠느냐”며 “가만히 있는 것보다 할 말은 하는 게 재계 대표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전경련 측도 “그동안은 업무파악 기간이었다”면서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일 뿐 초기와 달라진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치권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재계 일각에서는 볼멘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경련이 자충수를 두었다”는 말까지 들릴 정도다. 즉 미묘한 시기에 정치권을 괜스레 자극해 더 심하게 압박받고 있다는 얘기다.
재계에 ‘전경련 회장이라는 자리는 잘해봐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재벌 회장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회장직을 한사코 고사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허창수 회장도 처음에는 수차례 회장직을 고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여곡절 끝에 회장직을 수락했지만 허창수 회장은 가만히 있어도, 목소리를 내도 비판받는 상황. ‘영국 신사’ 허 회장이 이 딜레마를 어떻게 돌파할지 주목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