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당신은 며칠 쉬십니까?”
▲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L 씨(31)는 평소에 자신의 회사가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끄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대학동기 모임에 가면 기분이 묘해진다. 급여까지야 민감한 사안이라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성과급은 서로 궁금하니 이야기를 하는 편인데 그때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동기 모임에 가면 본사 쪽에 다니고 있는 친구도 봅니다. 계열사긴 하지만 대부분 본사 지명도 때문에 취업 잘했다고 부러워하는 주변 분들이 많아서 평소에는 사실 우쭐할 때도 있었지만 그 동기를 보면 그런 마음이 좀 덜하죠.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든 면에서 저희 회사가 본사보다 조건이 못하더라고요. 한번은 성과급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구는 500%를 받았다는 거예요. 저희 회사는 200%였거든요. 좀 창피하다는 생각에 우리 회사는 얼마 준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도 굳이 물어보지 않더군요. 어디 가서도 본사 직원 만나는 자리가 있으면 회사 이야기를 하는 게 꺼려집니다.”
디자인 회사에 근무하는 K 씨(여·26)는 토요일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직장인들을 보면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토요일 출근이 이제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단다.
“동호회에서 야유회를 가는데 토요일로 날짜가 잡혔어요. 저는 출근 때문에 참석을 못하는 상황이었죠. 모임 있을 때 출근 때문에 힘들겠다고 했더니 동호회 언니가 요새도 토요일에 출근하는 회사가 있느냐면서 굉장히 안됐다는 표정으로 보더라고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데 우리 회사가 너무 창피했어요. 비교적 작은 회사에 다니는 분도 주5일제인데 우리 회사만 토요일에 출근하는 상황이었죠. 제가 일하고 있는 분야가 부끄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회사는 때때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역업체에서 근무하는 C 씨(32)도 K 씨와 심경이 비슷하다. 일이 재미있어 만족감도 있는 편이지만 회사 이야기만 나오면 조용해진다고 하소연했다. 업무강도에 비해 급여가 많지 않고 휴가 등의 복지 혜택도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가철을 앞두고 여자친구는 일주일 일정으로 해외에서 한번 보내고 싶다고 하는데 제가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주말 포함해서 월·화·수를 쉬거나 목·금·토를 쉬어야 하니 일주일 휴가는 꿈도 못 꾸죠. 여자친구는 이번 휴가를 별렀던 터라 일정 때문에 같이 못 가겠다고 했더니 화가 단단히 났나 봐요. 회사가 진짜 너무한다고 하는데 미안하기도 하면서 창피하기도 했죠. 평소에도 야근이 많아서 평일에 저녁 한 번 먹으면서 편하게 데이트 한 적이 없었거든요. 반면 여자친구는 급여가 저보다 많지 않아도 직원복지가 잘 되어 있고 출퇴근 시간도 일정한 편입니다. 회사 때문에 여자친구 앞에서 톡톡히 망신당했습니다.”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J 씨(28)는 상사와 함께 영업을 하러 갔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회사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인지도가 낮아서라고는 생각하지만 업체 담당자를 만나면 그 시큰둥한 표정이 눈에 보입니다. 열심히 설명을 해도 건성건성 듣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영업할 때도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요새는 그런 마음이 잘 들지 않아요. 업체에 전화를 할 때도 뭐 하는 회사냐고 먼저 물어보는데 길게 설명을 하면 알았다고만 하고 다음으로 진행이 안 됩니다. 인지도는 직원들이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영업하면서 맥 빠질 때가 많습니다. 업계 모임에서도 사람들이 우리 회사를 잘 모르면 속상하죠.”
회사의 무리한 요구로 지인들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직장인들은 회사가 창피하다. 중소 전자회사에 근무하는 M 씨(33)는 자신이 딱 그 상황에 처하니 이 회사에 다닌다는 게 참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가끔 아는 분들한테 카드나 보험 부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큰 금융회사에서 영업직원도 아닌데 왜 저런 걸 할당하나 싶어 속으로 혀를 차곤 했었는데 저는 더한 상황에 처해질 줄 그때는 몰랐죠. 회사에서 학습용 소형 전자제품을 개발했는데 시장의 반응이 별로였어요. 문제는 회사에서 재고를 직원들한테 할당량을 주고 떠넘긴다는 겁니다. 친인척들한테 부탁하는데 정말 창피하더라고요. 부모님은 영업직도 아닌 직원들한테 떠넘기는 회사가 어디 있느냐고 하셔요. 그런 회사에 다니는 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죠.”
A 씨(여·28)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IT 회사에 다니지만 어지간하면 회사 이름을 잘 말하지 않는다. 이름을 말하고 구체적으로 질문이 들어오면 회사가 창피해지기 때문이란다.
“인지도는 있는 회사예요. 누구를 만날 때 회사 이름을 대면 거의 대부분 안다면서 괜찮은 데 다닌다고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예요. 회사를 다 알 만하니까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한 거죠. 그럴 때면 참 곤란해집니다. 한마디로 모든 ‘잡일’을 도맡아 하거든요. 청소도 해야 하고 비품도 채워 넣어야 하고, 문지기에다 손님 오면 바로 커피를 대령하고 아무리 전화벨이 울려도 전화는 제 몫이라고 다른 직원이 받아주지 않습니다. 사장 재떨이도 비워놓아야 하고요. 월말이면 간단한 회계 보조일도 합니다. 사람들이 꼭 업무에 관해서 물어보는데 잡일한다고 말할 순 없잖아요.”
최근 한 취업포털에서 남녀직장인 506명을 대상으로 ‘회사 충성도 유효기간’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70% 이상이 ‘입사 3년 이하’라고 답했다. 회사가 자랑스럽지 않게 되는 시점이 3년이라는 얘기다. 어째 이직이 늘어나는 시점과 비슷하다. 남아서 자랑스러운 회사로 만드느냐, 자랑스러운 회사로 옮기느냐 기로에 놓이는 셈. 이 유효기간은 회사가 직원들을 얼마나 배려하느냐에 따라서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 경영진이 이들의 불만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