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모티브 ‘김운범’ 역할 “자신과 대화하는 외로운 캐릭터”…선거전략가 ‘서창대’ 역 이선균과 투톱 주목
“김운범은 위치상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인물이죠. 정치 지도자라는 입장에서 이 조직을 끌고 나가지만, 영화상에서는 굉장히 외로운 캐릭터였던 것 같아요. 자기주장이 강하고 남들을 이끌어나가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실 영화 속에서 보면 주도적인 모습보단 리액션을 좀 더 많이 하는 걸 볼 수 있죠. 그런 면에서 이 캐릭터는 참, 누군가와의 대화가 아닌 혼자와의 대화를 하는 외로운 캐릭터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킹메이커’에서 설경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정치인 ‘김운범’ 역을 맡아 치열한 선거판에 뛰어드는 이야기를 그린다. 연임 중이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신민당 대선후보가 맞붙었던 1971년을 배경으로 한 '킹메이커' 속 김운범은 김대중 후보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실존 인물이 있는 만큼 그의 모습을 지우고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기에도, 아예 그대로 흉내 내기에도 성이 차지 않았다는 게 설경구의 이야기다. 그저 하던 대로 연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작품에 임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보면 연상되는 분이 있기 때문에 그분을 철저히 무시하고 다른 방향으로 갈 순 없었죠. 사실 그 당시 동영상이나 참고자료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영상들도 공식적인 모습이기에 개인적인 모습이 담긴 자료가 없었어요. 그래서 공개돼 있는 모습들을 눈에 많이 담으려고 했고,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하기보단 제가 연기를 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그분의 모습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김운범의 선거 캠프에서 존재도, 이름도 숨겨진 선거 전략가 서창대 역으로는 배우 이선균이 열연했다. ‘선거판의 여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만을 위해 뛰었던 마타도어의 귀재 ‘엄창록’이 그의 모티브다.
소신 하나만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하게 버텨야 하기에 평면적인 캐릭터로 비칠 수 있는 김운범과 달리 서창대는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기도 하고, 김운범을 향한 존경과 그림자로만 남아야 한다는 인간적인 서운함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하는 복잡다단한 면모를 보인다. 작품의 큰 틀을 김운범이 묵직하게 잡고 있다면 그 안에서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역할은 서창대가 맡는 셈이다.
“이선균 씨는 원래 그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불한당’ 때 전혜진 씨를 통해 몇 번 자리가 마련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인상이 정말 좋았거든요. 서창대도 감정의 선이 확확 드러나게 표현되는 캐릭터가 아니기에 정말 어려운 역인데, 그런 복합적인 감정표현을 정말 잘해줬어요. 사실 제목에서 보시다시피 이 영화는 ‘킹메이커’가 끌고 가는 영화잖아요. 킹은 딱 그 자리를 잡아줄 뿐 전체적으로 흔드는 역은 킹메이커라고 생각하는데 그 역할을 너무나 잘해준 거죠. 이선균이란 배우는 굉장히 일관적인 사람이에요. 기복도 없고 멘탈도 강하고 흔들림이 별로 없는 사람이죠. 또 현장도 즐겁게 두루두루 챙기는 스타일이어서 서창대와 아주 딱 맞는 캐릭터가 아니었나 생각했어요.”
설경구-이선균 투톱의 첫 호흡과 더불어 ‘킹메이커’는 설경구와 변성현 감독의 재회라는 점에서도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영화를 스타일리시하게 찍는다’는 평을 받는 변성현 감독의 작품인 만큼 이번 ‘킹메이커’ 역시 그의 취향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연출 방식이 눈에 띄었다. 다만 본인은 ‘스타일리시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고 설경구는 귀띔했다.
“김운범에게 쏟아지는 빛이 강할수록 서창대라는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는 것에 콘셉트를 잡고 촬영했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는 그런 부분이 좀 더 과장되게 비춰진 것도 있어요. 그런 연출에 집중했을 뿐이라 ‘스타일리시’라고 평가되는 것에 변성현 감독이 부담을 가지더라고요(웃음). 저는 변성현 감독이 스타일리시함을 추구한다기보단, 본능적으로 ‘멋있어야 하는 것’에 뭔가 (소신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영화 곳곳에 묻어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김운범 장면에선 스타일리시한 게 없었던 것 같은데…. 김운범에게선 그걸 포기했나 봐요(웃음).”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에서 시작된 인연을 이어가는 그들을 보며 누군가는 “큰형과 막냇동생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종종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투닥투닥 입씨름을 하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느껴지더란다. 이 말에 설경구는 웃음을 터뜨리며 “저희가 많이 싸우긴 했다”고 인정했다.
“티격태격하면서 그랬죠. 변성현 감독은 술 마시면 대드는 동생 같고, 저는 그 잔소리를 듣다듣다 지겨우면 화내고(웃음). 그런데 그 다음 날엔 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소대로 일해요. 그러다 또 싸우고(웃음). 사실 저흰 그게 어느 순간부터 재미가 돼 버려서 그냥 버릇처럼 티격태격하는 건데, 요즘은 좀 조심하고 있어요. 그런 (싸운다는) 소문이 나서, 우리끼린 아무 일도 없었는데 주변 분들은 걱정하시더라고요(웃음).”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이들의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라면, 설경구의 차기작 목록에 또 변성현 감독의 이름이 오를 일은 없었을 터였다. ‘킹메이커’가 끝나면 설경구는 변성현 감독의 첫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으로 세 번째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공개를 앞둔 또 다른 영화 ‘야차’ 역시 넷플릭스 스트리밍으로 시청자들과 마주한다. 이처럼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확대로 무대가 확장됐지만 설경구는 여전히 ‘고전적인 무대’를 갈망한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과정은 이전과 같아요. 단지 어디에서 공개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런데 저는 아직도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요. 지금은 코시국이라 어쩔 수 없이 개봉이 밀려있는 작품들이 많지만 그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까 싶어요. 많은 관객 분들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어 한다고 믿고 싶거든요. 아마 코로나가 진정이 되고 또 종식이 되면 다시 정상화가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OTT는 또 그것대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될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